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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거울에 나를 비추다
치매 거울에 나를 비추다
  • 의사신문
  • 승인 2017.11.13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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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10〉 
유 형 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 시인·수필가

“내 집에 앉아 있던 동안 내내 어머니는 당신의 짝 바뀐 양말만을 만지작거리고 계셨다. --- 화장실에 다녀오면서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신 뒤에는 냉장고 문을 닫지 않으셨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머니가 잃어버리고 있는 습관적인 기억들에 대해 아는 척하지 않고 있었다. - 중략 - 잊혀지는 것. 그것이 지나간 시절의 희망이거나 현재를 짓누르는 절망과 같은 것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지. 그러나 어머니는 아무것도 잊지 않고 계셨다. 고작 당신이 잊고 있는 것은 양말은 반드시 제 짝을 맞춰 신어야 한다는 사실, 그런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김인숙의 소설 `거울에 관한 이야기'에선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세 차례 유산한 적이 있는 딸이 만나 주로 과거를 이야기한다. 이야기 사이사이 어머니의 거울에 관한 기억과 생각들을 주섬주섬 채워간다.
어머니가 거울을 깨뜨리신 것을 알고 주인공 윤희는 작은 경대를 사놓고 어머니를 기다린다.

거울은 갑자기 전보다 더 투명해지고 더 번쩍번쩍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이미 늙어 가고 있던 주인을 새로 만나, 십 년 넘게 그 주인의 얼굴을 지켜보아 온 거울이었다. 그 거울의 번쩍이는 광채는 주인의 마지막까지도 지켜보겠다는 듯이 맑고 투명하고 또 속이 깊었다. - 중략 - 어머니가 거울을 깨는 바람에 큰일이 날 뻔했었다는 소식을 올케로 부터 전해 들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렸던 것은, 어느 날 바뀐 양말을 신고 내 집에 다니러 오셨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새 거울을 함께 고르고 돌아와 집근처에서 어머니를 내려드리자마자 건널목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딸은 울컥한다. `그 쨍한 햇살 아래 우산을' 펼쳐든 어머니의 쇠퇴하는 인지능력이 일상이 되어가는 변화에 `와락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힘주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룸미러 속에는 다시 어머니의 모습만이 보였다. 어머니는 차들이 씽씽 달리는 거리 한복판의 건널목 앞에 서 계셨다.' 울컥하면서 예전에 어머니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거울의 뒷면을 보고 자기 얼굴이 안 보인다고 미쳐 버렸대요.”

`거울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딸의 감정 서술로 끝난다.
나는 어머니가 거울의 앞면을 통해, 저쪽 거울의 뒷면까지 걸어가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울의 앞면과 뒷면 사이 그 사이에는 더 이상 건널목이 아닌 강물이 출렁이며 흐르고 있었다.

장들뤼모의 생각에 따르면 거울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거울에 반사된 이미지는 환상이다. 거울속의 오른손은 거울 앞에 선 사람의 왼손이다. 나르시스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로잡힌다. 거울이 꾸미는 광학적 눈속임이다. 눈속임, 아니면 착각일까. 시몬 베이유는 “아름다운 여인은 거울을 보고 자신이 바로 그 모습 자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못 생긴 여인은 그게 다가 아니란 것을 안다”고 말한다.[`거울의 역사' 사빈 멜쉬오르 보네/윤진 역] 그 착각은 거울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스스로가 자아내는 결과일 것이다. 거울을 보고 있는 그 순간의 마음새에 따라 예쁘게 또는 밉게, 멋지게 또는 열등하게 내가 보는 것이지 거울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거울은 그저 비추인 것을 반사할 뿐이다.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친구 어머니의 부음을 받고 들린 영안실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연상한다.
돌아가신 친구 어머니에게 치매가 있었다는 사실이 어쩌자고 그렇게 가슴을 막막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분이었는데도 나는 친구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치매 환자인 친구 어머니가 길을 잃어버리고 거리에 서 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곧 친구 어머니의 모습이 내 어머니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내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최근의 기억은 스러지고 과거의 기억은 대체로 고스란하다. 어머니는 치매로 `옛날의 딸'로 돌아간다. 그래서 딸은 거울 앞에 서서 우물거린다. 환상의 허구성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사람이 가장 그럴싸하게 사실과 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 중의 하나는 거울 앞에 서는 일이다.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 그리고 어머니의 인지능력을 한꺼번에 들여다보는 것이다. 어머니가 거울이다.

“진실의 기억을 은폐하기 위해 `덮개 기억'을 만든다. 즉, 과거의 사건은 사건이 일어난 후에 기억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자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과거의 기억은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과 인접되어 있는 사항들을 연상하여 기억하는 것이어서 항상 조작된다. 기억하기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을 덮고 대신에 평범하고 의미 없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기억하는 게 덮개 기억이다.”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견해다.

거울을 보는 것은 앞면에 보이는 것에 뒷면의 이미지를 덮는 일이 아닌가. 그 덮개에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타협'이라고 부르고 싶다. 타협은 승패의 일차적 감정을 이겨낸 사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두어 가지 욕구가 서로 충돌하고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이제는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 풀어내는 타협은 결국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변화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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