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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참으로 잔인합니다<23>
사월이 참으로 잔인합니다<23>
  • 의사신문
  • 승인 2010.04.22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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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도 자라기를 멈추고 오로지 꽃에만 집중하고 있는 풍란은 꽃도 나비도 없는 사무실 창가에서도 새 생명을 꿈꾸고 있습니다.
주말인데 또 사무실에 나왔습니다. 창밖을 보다가 갑자기 `잔인한 사월'을 생각했습니다. 시인이 이 한 구절에 담은 많은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습니다. 그런데 꽃잎이 벌어지고 있는 나도풍란을 보니 아주 작은 단편 정도는 알듯 합니다.

지난 2월부터 거의 두 달 동안 나도풍란은 새 뿌리를 키우고 꽃대를 키우느라 무진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느 날 몸 옆을 찢어 헤집으며 뿌리들이 나오더니 봄 햇살을 받으며 무럭무럭 뻗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잎이 붙어있는 틈을 찢으며 꽃대가 올라오고. 그리고 4월이 되자 자라던 뿌리들도 멈추고 오직 꽃망울만 키워냅니다.

그러더니 오늘에서야 꽃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풍란은 제 몸을 찢어가며 내민 뿌리까지 자라기를 멈추게 하고 오직 꽃과 그 속에 품고 있을 새로운 생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 꽃이 별 꾸밈도 없고 예쁘지 않은 수수한 촌색시 같아 보기에는 편안합니다.

찾아올 벌도 없고, 나비도 없고, 또 다른 날벌레도 없는데 여전히 맑은 향을 풍깁니다. 그저 새 생명을 키워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뿌리와 꽃과 향에 배어 있습니다. 풍란은 지금 제 몸이 찢어져 아파도 아파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직 향은 그리 진하지 않습니다. 꽃송이가 몇 개 더 벌어져야 지나가는 동료들이 알아챌 만큼의 향이 흐를 것입니다. 다가올 월요일 아침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을 때면 이 사무실의 다른 사람들도 눈치를 챌 것입니다.

사무실 창가엔 나도풍란이 그렇게 봄을 맞고 있습니다. 그리고 창밖엔 목련꽃잎이 툭툭 떨어집니다. 구름처럼 피어난 벚꽃은 가는 봄이 아쉬운 듯합니다. 참으로 봄날이 이보다 더 화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슴 한 구석은 찡합니다. 해군 함정이 가라앉아 생떼 같은 자식과 남편과 아버지들이 숨졌습니다. 남해 어디선가 헬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군 총기사고 소식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야만 했던 젊은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전에는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몰랐습니다. 이제 몇 달 후면 입대하는 아들의 아버지이고, 다만 병상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며 하루를 보내는 어머니의 아들이고 보니 이제는 알듯 합니다.

지독하게 들여다보고 파헤쳐서 무엇이 부족했었는지 알아내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어머니와 아버지, 아내와 자식, 동료가 이토록 가슴아파하는 일이 더는 없도록 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돌아온 이들은 살아야 합니다. 남은 가족도 살아야 합니다.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몫까지 더 치열하게 살아야합니다. 어머니는 비록 음식조차 삼키지 못해도 삶의 용기를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파도 모두가 주어진 삶을 잘 살아내면 좋겠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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