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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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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7.10.30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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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8〉
유형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 시인·수필가

`예전 맛이 아니다.' `어릴 적 그 맛과 다르다.' 맛의 기억을 더듬어 찾아간 음식점에서, 오래간만에 들른 고향 밥상에서, 이렇게들 말하곤 한다. 개중에 가탈이 남다른 사람들은 `조미료를 많이 써서', `수입재료를 써서', `다량으로 만들어서', 심지어는 `정성이 부족해서'라고도 한다. 거의 모든 이들의 입맛이 그렇게 이르니 대부분의 음식 맛이 변한 것임에 분명하다.

모든 음식은 제각각 적어도 세 가지 맛을 지니고 있다. 우선 감각에 의해 정해지는 맛이다. 맛깔스레 음식을 만드는 이의 음식은 어느 누구에게도 맛있다. 먹음직하게 차린 상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고, 향내 좋은 것은 코맛을 가져다주고, 연하고 맛진 음식을 씹는 소리는 귀맛을 전해주어 눈감고 입안에 넣기만 해도 맛이 감돈다. 때론 생각만 해도 뇌신경이 자연스레 나서서 맛을 느끼게 하는 음식도 있듯이 우리의 감각기관이 총동원하여 정하는 맛이 감각적 맛이다. 바로 이 감각적 맛은 나이에 따라 뚜렷이 변한다. 여자에선 사십대 초반, 남자에선 오십대부터 혀에 있는 맛돌기들이 위축하면서 돌기의 맛싹의 개수와 기능이 현격히 감소하여 청년시절에 돌기마다 이백 오십여 개씩 있던 맛싹이 칠십오 세에서 팔십사 세가 되면 백 개미만으로 줄어든다.

혀의 노화는 혀끝에서 가장 두드러져서 혀가 느끼는 단맛, 신맛, 쓴 맛, 짠맛의 네 가지 중에서 짠맛의 감지가 가장 먼저 무디어지고 단맛의 감각도 동시에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입안 점막의 노화도 미각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입안 점막은 피부의 노화와 비슷하게 얇아지고 수분이 줄어들어 약해진다. 치아의 상태, 후각의 노화, 침샘의 노화와도 연관이 있고, 미각을 담당하는 뇌신경들인 제7번 얼굴신경, 제9번 혀인두신경, 제10번 미주신경 등의 기능 변화도 입맛을 변화시킨다.

특히 냄새 맡는 후각 기능은 삼사십 대에 절정에 이르고 나면 둔감해지기 시작한다. 후각이 가장 두드러지게 둔해지는 시기는 칠십대다. 이러한 입맛의 감각적 노화 원인들에 반드시 보태어 짚을 것이 있다. 약물복용이다. 한 가지 이상의 질환으로 평균 세 가지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노인은 음식에 소금은 보통 열한 배, 설탕은 세 배를 더 넣어야 보통의 입맛을 지닌 이들과 같은 정도의 짜고 단 맛을 느낀다고 한다. 치아상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여러 인자들이 모두 늙음과 관계가 깊다.

음식이 지닌 영양을 포함한 의학적 성상에 의해서도 음식의 맛은 결정된다. 대표적 예가 보리밥 맛이다. 1886년 일본 동경제대 의학부 내과 초대 과장으로 부임한 독일인 의사 벨츠 박사는 그 당시 일본인의 식생활에 깜짝 놀랐다. 단백질 섭취가 턱없이 적었고 비타민 B 등의 공급이 상당히 부족하였다. 이는 고기를 구하기도 힘든 생활수준과 직결되어 있었다.

벨츠 박사는 비교적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궁리한 끝에 이렇게 권고하였다. “구하기 쉬운 땅콩과 두부로 단백질 섭취를. 보리밥으로 비타민 B 등의 보충을 높이자.” `건강과 영양에 이롭다'는 그의 궁리는 경제 수준이 훨씬 발전한 오늘에도 보리밥의 의학적 영양학적 맛을 튼튼하게 받쳐주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더 든다면 채소다. 요즈음은 너도나도 의식적으로 채소를 늘려 먹는 경향이 있다. 신선한 채소를 넉넉히 주는 식당을 선호한다. 밋밋한 채소보다 고소한 기름기가 분명 맛있음에도 `채소가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면 채소 맛이 슬그머니 고소하게 느껴진다. 의학적 맛이 구미를 당기는 덕분이다.

세 번째 맛은 사회적 맛이다. 지난 가을 거둔 곡식은 다 떨어지고 올 농사 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오뉴월, 주린 배 움켜잡고 보릿고개 넘던 때엔 풀죽도 귀하고 기막힌 맛이었다.

또한 꽁보리밥에 변변찮은 반찬이라도 소풍가서 친구들과 먹는 점심 맛은 일품이 아니었던가.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로 대신하기엔 너무도 절절한 사회적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지금도 서로 거스르지 않는 지음(知音)과 어울려 먹는 음식은 가격이 어떠하든, 그 음식이 맛을 부렸든 안 부렸든 맛있다. 물론 먹을 게 있더라도 물끄러미 신앙의 대상으로 바라만 보면서 그렇지 않은 이들과 사뭇 다른 사회적 맛의 하나인 종교적 맛을 즐기고 있는 이들도 있다. 이 또한 넓은 의미의 사회적 맛이다. 그저 `밥맛없는 친구'와 상대하기를 줄이고 기왕이면 정나미 콸콸 넘치는 `밥맛 있는 친구'와 입맛을 함께 하기만 하면 달달하고 고소해지는 맛이 사회적 맛이다.

이처럼 음식은 감각적, 의학적, 사회적 형편을 골고루 섞어 그 맛을 낸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감각이 무디어지고, 하나 둘씩 질병의 개수가 늘고, 살아가는 형편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니 같은 음식이라도 예전의 맛 그대로 일 수 없다. 어차피 늙음은 순한 이치대로 입맛을 바꾸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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