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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의사신문
  • 승인 2017.09.2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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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5〉
유형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시인·수필가

영화 제목으로 오히려 더 알려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표현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서구 시인의 한 사람으로 추앙 받는 윌리암 버틀러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첫째 줄 `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 것이다. 총 네 연 중에서 먼저 첫째와 둘째 연을 의역한다.

저곳은 노인들이 살만한 나라가 아니다.
서로 껴안은 젊은이들, 나무에 깃든 새들
노래에 취한 채 - 죽어가는 세대들 -
연어 솟구쳐 튀는 폭포, 고등어 가득한 바다,
물고기, 짐승, 또한 가금류들, 여름 내내 찬양하고,
늙지 않는 지성의 기념비를 무시하고
관능적 음악에 빠져
잉태하고 태어나고 죽는 모든 것들.

무릇 늙은이는 한낱 하찮은,
지팡이에 걸쳐놓은 해어진 누더기 외투일 뿐
사라져야할 옷 안의 모든 누더기들을 위하여
영혼이 손뼉 치며 소리 높여 노래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의 장엄한 공적을 노래하는 학교도
깊이 생각하는 학교도 없다
하여, 나는 바다를 건너
성스러운 도시 비잔티움으로 왔노라

`나 일어나 이제 가리라'로 시작되는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으로 잘 알려져 있는 예이츠가 예순 살이 넘어 쓴 시다. 늙음에 처한 예이츠는 현실을 `더 이상 의존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쇠퇴해가는 육체의 세계'로 보고 `환멸과 경멸의 눈초리'[`예이츠 시에 나타난 존재의 조화', 양현철]를 보내고 있다. 이러한 현실과 달리 정신이 더 작동하고 영원한 예술성과 작품이 넘치는 공간을 관념 속에 상정하여 그 공간의 명칭을 비잔티움이라 부르고 있다. 이어지는 제3, 4연에서 예이츠는 영적으로 성스러운 곳, 비잔티움을 노래한다.

오, 신성한 불 속에 서 있는 성인들이여
마치 벽의 금빛 모자이크 속에 있듯,
성화로부터 소용돌이처럼 돌아 나와
내 영혼의 노래 스승이 되라.
욕망에 병들고
자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죽어가는 한 마리 동물에 집착하는
나의 심장을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나를
영원한 예술품 속으로 모아 넣어라.
일단 자연을 떠나면 나는 절대로
내 몸이 어떤 자연의 것도 닮지 않게 하리라.
단지 희랍의 금세공이
졸음 오는 황제를 깨우기 위해
또는 비잔티움의 귀족과 귀부인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노래하도록 황금가지 위에 앉히기 위해
두드려 편 황금과 황금에나멜로 만든
그런 형상이 되리라.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퓰리처 수상 작가인 코맥 멕카시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상화한 것이다. 그러니까 멕카시가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소설 제목을 영화 제목으로 다시 사용한 것이다. 이 영화에는 제목과 전혀 다르게 노인이 안 보인다. 단지 동기가 불분명한 살인이 횡행하고, 동전던지기로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황당함만이 가득하다. 제목 속의 노인(old men)은 나이든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옛날 사람들을 의미한다. 비교적 범죄가 적고 상대적으로 덜 험했다고 생각하며 옛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노인이라 부른 것이다. 덧붙여 풀면, 날이 갈수록 세상이 평탄치 않아지고 험궂고 거칠어지기만 하므로 옛날을 찾는 이들의 나라는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이츠 시 속의 화자는 나이가 많은 노인이고, 영화 제목 속의 인물은 옛날을 동경하는 노인이다. 두 노인 모두 자신을 에워싼 형편과 상태가 마뜩찮다. 그렇지만 현실 평가에 따른 해법은 양쪽이 판이하다. 영화는 황당한 현실 앞에서 멍하니 우연에 미래를 맡긴 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중얼거릴 뿐이다.

반면에 시인은 `노인을 위한 나라'비잔티움을 그리면서 적극적으로 구하고 있다. 그곳에서 노쇠한 육체는 잊고, 노쇠 대신에 영혼이 금빛으로 빛나는 영원한 예술품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존재하기를 노래하고 있다.

어떤 나라가 노인을 위한 나라인가에 대한 견해는 대단히 다양할 것이다. 고려장이 없는, 노인 복지가 완벽한, 서서 가는 노인이 없는 전철, 노인병 전문의가 제대로 진료하는, 아예 노인이 통치하는… 어느 것도 노인을 위한 나라 자체는 아니다. 단지 그 곳에서 필요한 요건들의 편린에 불과하다. 어쩌면 노인을 위한 곳은 예이츠가 꿈꾸는 비잔티움에만 있을지 모를 일이다. 다시 한 번 어쩌면, 노인이 꿈을 꿀 수 있는 곳, 꿈 꿀 줄 아는 노인이 있는 곳이 다름 아닌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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