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聖)스러운 방사선 의학자 나가이 타카시
성(聖)스러운 방사선 의학자 나가이 타카시
  • 의사신문
  • 승인 2017.09.1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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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70〉

얼마 전 친구 K가 이 시기에 읽기 좋은 책이라고 〈영원한 것을〉, 〈묵주알〉 2권을 나에게 선물 하였다. 일본 나가사키 의과대학의 교수였던 나가이 타카시의 자서전과 수필집이었다. 그는 1945년 원자폭탄으로 큰 피해를 본 나가사키 시에서 성인(聖人)에 가까운 인물로 존경을 받고 있다.

조선 초 성종 때 대사헌 이석형 공이 한국판 히포크라테스 선서인 `의원정심'을 제정하였다. 그는 의사를 의자(醫者), 의원(醫員), 의학자(醫學者)로 나누었다. 의자는 의학에 충분한 지식 및 술기를 익힌 사람, 의원은 여기에 성실성과 공평성을 갖춘 의사를 지칭하였다. 최상급인 의학자는 교만하지 않고 성스런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여 세간의 존경을 받는 의사로 정의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나가이 교수는 진정한 의학자였다. 아니, 의술을 넘어 그의 삶 전체에서 존경을 받았으니 의학자 경지를 넘어섰다고 나는 생각한다.

1908년에 태어난 나가이 교수는 일본에서 방사선을 이용한 진료와 연구의 선구자였다. 그 당시에는 과도한 방사선 피폭의 부작용을 모르고 있었기에 의학이용에 열중하다가 백혈병까지 걸린다. 또한, 태평양 전쟁으로 나가사키 시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폐해를 수습하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의 정신적인 지주가 된다. 나는 수년 전 나가사키 시를 방문했을 때 박물관에서 그에 대한 전시물을 본 적이 있다. 이번에 다시 인연이 닿아서 이 책자를 읽게 된 것이다.

간단히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자.

그는 기본적으로 휴머니스트였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소중히 여기려는 뜻으로 자기 방을 여기당(如己堂)이라고 명명하였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검정고시로 의사가 되어 시골에서 개업하고 있었다. 정규 학력에 대한 미련이 많은 아버지의 꿈을 좇아 의과대학 교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규수에 있는 나가사키 의대에 들어가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가정교사를 하면서 의학공부를 계속한다. 이때 가톨릭 신자 가정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신앙에 가까워진다.

졸업반 때에 급성중이염을 앓아 그 후유증으로 청력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청진기를 사용하는 임상의사가 될 수 없어 우연히 기회로 뢴트겐을 전공하게 되었다. 당시 뢴트겐과는 외과에 소속되어 발전도 더디고 인기도 없는 의학분야였다. 그러나 기존의 임상 진단과 치료법으로는 불충분한 여러 질환에서 점차 이용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원자물리학의 첨단 지식을 의학에 적용한 의과학적 혁명이었다. 흥미를 느낀 그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방사선의 이용과 연구에 열중하게 된다.

성탄절 날 저녁 하숙집 주인 딸 하루노가 맹장염에 걸리자 그가 구해준 인연으로 결혼을 한다. 건실한 그녀의 내조는 타카시가 의학자로서 성공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었다. 1933년 군의관으로 만주사변에 참전하여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다가 가톨릭 신앙에 귀의하게 된다. 전쟁 후 대학에 조교수로 돌아 와 방사선과의 진흥과 독립에 몰두하였다.

특히 연구에 열중하여 임상의학계를 선도하나 방사선 피폭을 많이 받게 된다. 우연히 급성 인후염을 항체로 치료하다가 부작용이 생겨 고생을 하고 체질이 변해 천식발작이 시작되었다. 그는 더 한층 종교적으로 변하여 육신의 허무함을 실감하고 세상사와 멀어진다.

1941년 일본 군부가 영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일본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그는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를 뢴트겐으로 적절하게 치료하기에 분주하면서도 대학교수의 본분에 매진한다. 기자재가 부족하여 필름 없이 투시를 하면서 방사선에 수없이 노출되고 마침내 만성골수성 백혈병이 발생한다. 3년 정도 생이 남았다는 통보를 받자 그는 잠시 당황했으나 그 기간이면 자신의 일을 끝내기에 충분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10년이라면 도중에 마음이 해이해 질 수 있지만 긴장 상태를 유지하면서 일을 계속하기에는 3년은 꼭 알맞은 시간이다.”

운명의 날인 1945년 8월 9일이 되었다.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시에 떨어진 것이다. 오전 11시 그가 연구실에서 문득 창 밖을 보니 아름다운 항구도시의 지붕들이 자줏빛으로 늘어 서 있고 그 위에 눈이 부실 만큼 푸른 나무로 가득한 이나사 산이 보였다. 창 밖 오동나무에는 매미가 한창 울고 있었다. 웬일인지 잠시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번쩍 시퍼런 섬광이 가로지르고 세상은 온통 폭풍과 먼지로 깜깜해졌다. 의식을 회복하고 간신히 다친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내다보니 지구가 벌거숭이가 된 것처럼 아무것도 제 자리에 없었다.

살아남은 의료진 몇 명으로 사태를 수습하고 있을 때 그는 분신 같은 연구 자료들이 잿더미로 변한 것을 발견한다. 3년동안 버티려고 한 모든 것이 끝이었다. 더 큰 비극은 가족에게 있었다. 대학에서 1 km 떨어진 집이 없어지고 부인 하루노는 한줌의 뼈로 남아있었다. 3년 후 남편의 유골을 안고 가기로 되어있던 부인이 먼저 새카만 재로 변한 것이다. 두 어린 것도 같은 길을 갔다. 전쟁에 대한 인류의 운명을 생각하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이 땅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1945년 10월 나가이 교수는 피폭 당시의 사건들을 기록한 `구호대 활동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만 두라, 멈춰라. 사람들은 원자폭탄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기 때문에 불장난을 하는 것이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반드시 진상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나가사키 최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또, 피신하여 살아 남은 두 남매와 함께 피폭지에 거주하면서 잔류 방사성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학문적으로 관찰하였다. 이런 과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재개발 시기를 앞당길 수 있었다.

그는 남은 생을 오두막 여기당에서 지내며 구호와 진료에 몰두하였다. 한편, 문필가로 17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집필하여 시련으로 더 강해진 인본주의 신념과 신앙을 전파하였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진실과 사랑, 희망을 평이한 어투로 표현한 책들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원고료는 모두 이웃에게 기부하였다.

나가이 교수는 피폭 후유증과 백혈병으로 1951년 43살의 나이에 타계했다. 일본정부는 국가표창과 나가사키 명예시민증을 수여했다. 장례는 폐허가 된 우라카미 교회 광장에서 2 만 명이 모여 이 참 영웅을 회상하는 가운데 엄숙하게 치러졌다. 영결식이 끝난 후 모든 교회와 성당, 사찰이 일제히 종을 울려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유서에서 “전쟁을 안 하겠다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 달라.”고 당부했다. 지금도 그의 기념관에 연 15 만 명이 참배하고 있다. 나가이 박사는 일본인의 마음 속에 `나가사키의 성자'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가이 타카시의 글에서 전쟁의 참혹함, 진정한 종교의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의 인류에 대한 사랑, 학문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가난, 청력 장애, 참전, 백혈병, 원폭피해, 가족의 사별 같은 역경을 겪었으나 모두 슬기롭게 이겨냈다. 오히려 한 인간의 삶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업보에서 얻은 지혜와 사랑으로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다독거리고 치유하였다. 또한, 개인의 전쟁 경험과 피해에서 굳세어진 반전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아직도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민중이 그를 성자에 가까운 인물로 추앙하는 이유이다.

덧붙여, 이 서적은 북한의 핵 위협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현 시국에서 우리 생각과 역할을 다시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독자 여러분에게 필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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