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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의 무늬
늙음의 무늬
  • 의사신문
  • 승인 2017.09.1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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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 오디세이아 〈3〉
유형준 한림의대 내분비내과 교수시인·수필가

신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에게 30년이라는 수명을 부여했다. 그런데 나귀와 개와 원숭이는 그렇게 오래 살기에는 너무 고달프다며 신에게 부탁하여 나귀는 18년, 개는 12년, 원숭이는 10년의 수명을 줄여 받는다. 이때에 곁에 있던 인간의 욕심이 발동하여 이 세 동물이 버린 수명을 몽땅 주워 자신의 생명을 70년으로 연장한다. 그리하여 본래의 30년은 인생을 준비한다고 불현듯 지나버리고, 노새로부터 얻은 18년은 가족들을 위해 무거운 짐만 지고 지새우고, 개로부터 얻은 12년은 이가 빠져 쓸모없어진 늙은 개처럼 이 구석 저 구석 눈치만 보고 다닌다. 뒤이은 원숭이의 10년은 노망으로 치기가 들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지낸다.

비록 동화 속의 이야기지만 그대로 따져보면 30년의 준비기간과 가족을 위한 18년을 합한 48년이 지난 이후엔 사람은 왜 늙고 병들고 약해지는 걸까? 몸은 어쩔 수 없이 늙는다 해도 형체도 없는 정신은 왜 황폐해지는 것일까? 그저 생식력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만 살아남을 만큼만 유지하면 그만이라는 `일회용 체세포 이론'을 비롯한 셀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연구 결과와 이론들이 계속 제안되고 있다. 믿을만한 교과서에 실린 노화학설만도 350여개가 넘는다. 늙음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늙음은 정의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학자들은 수정에서 사망까지의 변화를, 또 다른 학자들은 성숙기 이후의 생체변화를 늙음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후자를 일컬어 늙음이라 하고, 전자는 따로 구별하여 가령(加齡)현상이라고 한다.

흔히 어떤 사물이나 일을 한두 마디로 묘사하기 어려우면 세세하게 눈으로 보거나 마음으로 느낀 무늬들을 그림 그리듯이 객관적으로 표현하면 된다. 코헨 박사는 `세계보건기구 매거진'에 늙음이 갖는 특징적인 무늬들을 다음과 같이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요즈음 일에 대한 기억력이 떨어진다.
△자기중심적이 되어 자신의 기분과 감각에 따라 관심의 정도가 달라진다.
△지난 일, 과거의 고생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고 과거를 자주 후회한다.
△다가올 일에 대해 무관심하다.
△혼자 고민하고 걱정한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이 어렵다.
△타인과의 접촉을 주저한다.
△사회의 변화에 적응이 둔하고 의혹을 많이 갖는다.
△계획의 변경이 어렵다.
△잡다한 것을 수집한다.

코헨 박사의 묘사는 늙음의 부담스러운 모습의 무늬만을 그려낸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하여도 그의 열거는 기원전 149년까지 85세를 산 스토아 철학자 카토의 다음과 같은 의견과도 통하여 적지 않은 공감을 받고 있다.

“800살을 산다면 여든 살을 살 때보다 그 늙음이 사람들에게 덜 부담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긴 세월이 흘러갔다 해도 흘러간 세월이 위안이 되어 어리석은 자의 늙음을 가볍게 해 줄 수는 없지.”

이러한 늙음의 무늬는 세월이 쌓이면 누구에게나 드러나고, 진행되며, 결국엔 사망에 이르는 것이 순리다. 이를 거부한다 해도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노인이 되어, 위에서 말한 무늬들이 나타난다. 늙음의 보편적 진행성이다. 누구나 다 거쳐 가야 할 삶의 한 부분이라면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떻게 늙음을 맞이하고 겪을 것인가'일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그 답 하나를 구해본다.

“노년은 인생의 힘든 시기입니까 아닙니까?”라고 묻는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의 노신사 케팔로스가 답한다.

“소크라테스여,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지 당신에게 명확히 말해줄 수 있소. 우리 늙은이들끼린 유유상종이란 말처럼 함께 자주 만나기 때문이오. 우리가 만나면 대부분이 비통함으로 가득하오. 옛날에 어떻게 사랑했고, 술 마셨고, 파티에 가곤했었는지 회고하면서, 그리고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매우 큰 상실이라 생각하면서 젊은 시절의 즐거움을 갈망한다오. 그땐 좋은 시절이었지만 지금은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조차 없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일부는 가족들이 자신의 나이에 대해 존경심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며 늙음이 초래하는 불행에 대해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하오. 그러나 소크라테스여, 내 견해로는 그들의 불평은 번지수를 잘못 찾고 있소. 만약 늙음에 책임이 있다면 내 경험도 그들과 똑같고, 그래서 다른 모든 노인과 똑같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 나는 전혀 다른 감정을 가진 사람을 많이 만났다오. (---중략---) 이 모든 것에서, 그리고 가족들이 그들을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오. 소크라테스여, 그건 그들의 늙음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성격이오. 분별력이 있고 좋은 성격이라면 늙음은 견뎌내기 쉽기 때문이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늙음 뿐 아니라 청춘도 역시 고생보따리라오.”(`노년의 역사' 팻 테인 편/안병직 역, 필자 정리)

케팔로스의 사설이 다소 길고 지루하게 느끼는 이들을 위하여, 지혜와 절제라는 미덕과 함께 늙음의 즐거움을 힘주어 주장했던 키케로의 말을 빌린다.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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