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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을 바라보며 법정을 생각하다
난을 바라보며 법정을 생각하다
  • 의사신문
  • 승인 2010.03.2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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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꽃을 올린 자란.
 문득 세어보니 사무실에서 보살피고 있는 난이 열다섯이나 됩니다. 언제 이렇게 늘었을까요. 더러는 얻어왔고 더러는 사온 것도 있습니다. 화분이 늘어나니 일일이 들고 다니며 물을 주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 큼직한 분무기를 하나 샀습니다. 몇 번 펌프질을 하면 화분 두어 개쯤 물주기는 일도 아닙니다.

꽃대가 올라오고 있는 나도풍란의 뿌리 쪽에 물을 주고 있는데 함께 근무하는 직원이 다가오더니 한마디 합니다. 마이다스의 손을 가졌다는군요. 그냥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가능한데 다만 너무 바빠 화분에 대해서는 마음을 쓸 겨를이 없을 뿐입니다. 오며 가며 한번 만 눈길을 주면 난이 어떻게 크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화분마다 움직임이 왕성합니다. 사무실은 한 겨울에도 봄과 다름없이 따뜻한데 난들은 그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봄이 오는 소식이 들리기 무섭게 살마금은 바삐 새 촉을 올리고, 나도풍란은 몸통을 째며 새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꽃대를 키워내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난이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에게 주고는 싶은데 줄 수가 없습니다. 지난해 겨울 복숭아색 꽃을 피웠던 도희는 뿌리가 너무 많이 상해서, 몇 년 전 구입해서 키우던 애국은 세력이 너무 약해져서, 소엽풍란은 너무 오랫동안 키워오던 것이라 정이 들어서, 나도풍란은 이제 막 꽃이 올라오고 있으니 남에게 주기가 너무 아까워서… 너무하고 또 너무해서 이렇게 붙들고 있습니다.

난들을 바라보자니 오래 전에 생각 없이 읽었던 난초에 관한 글이 생각납니다. 키우던 난초를 남에게 주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가볍더라는. 인터넷을 찾아보니 법정 스님의 글이었습니다. 눈 질끈 감고 키우고 싶다는 사람을 찾아서 보내면 정말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도풍란 꽃이 피면 어딘가에 보내야 하겠습니다. 살마금은 여름 나고 꽃이 피면…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아직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다 눈길이 자란에 멎었습니다. 지난 해 봄 집 근처의 화원에 들렀다가 두 촉을 데려온 것입니다. 지난 겨울을 창밖에서 보낸 자란은 새싹을 내미는가 싶더니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올랐습니다. 그리고 며칠 동안 조용히 꽃봉오리를 고운 자주색으로 물들이더니 꽃잎을 열었습니다. 자란의 꽃 색을 다만 `고운 자주색'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저 고운 빛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내일 아침 병원 현관을 들어서는 사람들의 표정 없는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면 좋겠습니다. 아파서 오는 사람들도, 아픈 사람들을 위해 오는 직원들도 그리고 그냥 이 문에서 저쪽 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도… 아주 보내지는 말고 함께 바라보고 즐겨야 하겠습니다. 버리고, 보내고, 비우기가 참 어렵습니다.

오근식 <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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