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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2>
초월<2>
  • 의사신문
  • 승인 2010.03.2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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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들의 검사 결과들을 확인하다 보면 간혹 예상하지 못한 암(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우연히 발견하게 되는 암은 환자들이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당황하는 경우도 흔히 본다. 의사인 나의 입장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그래도 환자에게 당황스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최근의 암 치료율이 얼마나 높은지도 설명한다.

많은 환자들이 결과를 믿지 못하고 결과를 모두 복사해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사하기도 한다. 의사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다. 간혹 다른 병원에서 치료 후 다시 찾아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다. 암이란 질환은 의사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람도 느끼게 하는 질환인 것 같다.

많은 암환자를 보았지만 최근에 진료한 60대 여자환자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결과를 설명하는 날 손자로 보이는 5세 정도의 남자아이와 함께 방문하였는데, 내시경과 조직검사에서 대장암 판정이 나와 치료가 필요하다고 설명을 드렸다. 설명을 모두 들은 후 나에게 질문한 말은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합니까?” 이 한마디였다. 다른 환자들은 `어느 병원에 수술 권위자가 있느냐', `결과는 믿을 수 있는거냐'는 등의 많은 질문을 했었는데 그 할머님의 질문은 딱 한마디였다. 응급수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빠른 시일 내 치료를 받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일반외과 진료를 안내해드렸다. 그러나 할머님은 내일 아들과 다시 오겠다며 집으로 가셨다.

다음날 할머님은 30대 초반의 아들과 손자와 함께 오셨다. 할머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틀 후 아들이 중국에 돈 벌러 가야해요. 그동안 나는 손자를 보고 있어야 되지요. 며느리는 몇 년 전에 집을 나갔어요. 그러니 지금 수술 받고 입원할 형편이 안됩니다.”

나는 이렇게 설명 드렸다. “돈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할머니 몸도 중요하잖아요.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하실 수도 있어요. 할머님은 죽음이 두렵지 않으세요? 암은 치료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병입니다.”

그러자 할머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죽음은 무섭지 않아요. 늙으면 죽는게 당연한데 뭐가 무서워요. 단지 무서운 건 아들과 손자에게 짐이 되는 거예요.” 할머님이 얘기하시는 동안 아들은 고개만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한참을 대화하여 설득한 후 치료를 안내해드렸다.

할머님이 가신 후 나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대화하는 동안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모습을 보았다. 내가 만난 사람이 천주교의 성자, 불교의 보살, 유교의 성인, 도교의 신선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일년 전에 김수환 추기경님은 “세상에서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씀을 남기고 선종하셨고, 며칠 전에는 법정스님이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란 말씀을 남기고 입적하셨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두 분의 모습을 보며 많은 감동을 받았었다. 그런 위대한 종교인의 모습을 환자에게서 보았다. 가끔은 환자를 보며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아가는 나의 인생을 반성하게 된다.

조재범<성애병원 가정의학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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