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떠나는 여행<19>
홀로 떠나는 여행<19>
  • 의사신문
  • 승인 2010.03.2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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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풍란입니다. 제 몸을 헤집고 뿌리를 벋으면서 좌우의 잎 틈바구니에서 꽃대가 보입니다. 꽃대는 앞으로도 한 달은 더 자라야 합니다. 풍란은 뿌리가 공기 중의 질소를 흡수하고 탄소동화작용을 하기 때문에 거름을 주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혼자서 몇 시간 쯤 생각에 잠겨 본 적이 있으신지요? 직장, 일, 가족, 아니면 또 다른 어떤 일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괴로울 때는 훌쩍 길을 떠나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떠나보려고 마음을 먹으면 직장, 일, 가족 그리고 또 다른 그 어떤 일이 발목을 잡아 주저앉고 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에 크게 취해도 보고, 노래방에 가서 미친 듯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저처럼 술도 마실 줄 모르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노래하는 것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미적지근한 사람에게는 그래서 난이 제격입니다. 여기저기서 무관심하게 말라가던 난 화분 몇 개를 얻어와 다시 심고 물을 주며 한두 달 보살피면 난은 다시 생기를 되찾고 새 촉을 올리곤 했습니다. 새 촉이 삐죽 올라오고 있는 화분을 돌려받으며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난이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에는 사무실 창가에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난을 몇 분 보살피고 있습니다. 두 시간쯤 일을 하다가 갑자기 막히면 난을 들여다봅니다. 어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잎에 점은 생기지 않았는지, 너무 건조하지는 않는지, 꽃대 아니면 새 촉이 올라올 기미가 있는지, 뿌리는 새로 내리고 있는지 그렇게 십 분쯤 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눈길을 줄 뿐입니다. 그 길지 않은 시간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사라집니다. 때로는 화가 불처럼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먼데서 혼자 공부하고 있는 딸이 문득 보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다 두타산 아래 계곡의 멋들어진 개울과 덕유산의 가을 단풍, 추웠던 어느 날 설악산 산봉우리에서 비박을 하며 보았던 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미국과 설악산과 덕유산을 넘나듭니다. 때로는 함께 일하는 동료가 슬그머니 다가와 뭘 그리 열심히 보는지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냥 웃습니다. 난을 바라보며 잠시 설악산에 다녀왔노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난들이 실내에서 늘 편안하게 지내다 보니 3년 쯤 지나면 부실해지기 시작합니다. 나도풍란과 소엽풍란을 제외하고, 석곡과 보세 그리고 가을에 꽃이 피는 화분 몇 개는 다시 생기를 되찾을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래도 호기심으로 바라보면 난들은 하루하루 조금씩 달라져 갑니다.

나도 풍란은 뿌리를 여러 가닥 뻗으며 잎 사이에서 꽃을 두 대나 올리고 있습니다. 3월이 기다려집니다. 그러나 새 촉을 올리던 적아소심계 난은 어찌된 일인지 갑자기 뿌리 쪽이 썩으며 잎이 말라버렸습니다. 화분을 쏟아 썩은 쪽을 빼내고 남은 난을 다시 심었습니다. 다행히 남은 쪽은 새 뿌리와 새 촉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 무성했던 화분은 이제 달랑 한 촉이 남았습니다. 지금 올라오고 있는 새 촉이 잘 자라주면 좋겠습니다.

담배를 피는 사람들은 일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슬그머니 자리를 떠 흡연구역을 찾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애꿎은 커피를 휘휘 젓기도 합니다. 어디로 가지 않아도 여기 사무실 안에서 잠시지만 수시로 떠날 수 있어서 저는 난이 좋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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