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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글<완>
마지막글<완>
  • 의사신문
  • 승인 2010.03.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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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 한 주 원고를 쓰느라 숨이 찼는데 돌아보니 1년이 지났다. 원고를 의뢰받고 몇 주만 쓰려했는데 여러 선생님들이 읽고 격려해 주신 데 힘입어 1년을 채우게 되었다. 이제 더 쓰면 골다공증으로 비어있는 뼈 속까지 모두 들어내야 해서 이만 멈추려 한다. 그동안 미숙한 글 쓰느라 끙끙대기도 했지만 마감 전에 글을 보내고 나면 시험 끝난 기분이었다. 지면을 통해 속마음을 털어 놓은 후 후련한 마음도 있었는데 앞으로는 마음속에 곱게 쌓아야 할 것 같다.

주변의 모든 분들이 내 스승이었으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이 글의 주제였다. 한 주 원고를 보내면 다음 주엔 뭘 쓸까하면서 가볍게 지나치는 일상을 좀 더 깊이 돌아보고 생각하게 되었다. 멋있는 글을 쓰기 위해 멋지게 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고 항상 실수를 했다. 가끔은 비수같은 비평의 글을 써놓았다가 하루 지나 지우기도 했다. 살아 갈수록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도 스스로 불편함을 겪는 것도 피하게 된다. 뾰족했던 펜촉이 무뎌지는 것이다. 가끔은 내가 쓴 글에 내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 옛글을 읽어보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부끄러움이 일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참고 읽어준 선생님들께 죄송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컬럼의 주제가 진료실 주변인데 진료실을 한참 떠난 글들도 많았다.

두뇌로 느끼고 분석하고 그 속에 쌓아 두는 습관이 세월이 가면서 가슴으로 느끼고 가슴에 품게 되었다. 제일 먼저 변화가 온 것은 진료실 안 환자와의 관계였다. 증상을 듣고 진찰을 하고 진단을 내리고 치료를 할 때마다 부작용이나 과실로 인한 후유증 등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설명까지 곁들인다. 항상 정확한 판단력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모든 과정들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환자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못다 한 말들을 내 가슴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차갑게 판단하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었던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이런 열정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생기기 시작했다. 환자와의 적당한 거리감이 어느 순간 허물어지는 당황스러운 경험들도 겪게 되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힘겨운 것이 아니라 글의 내용으로 인해 민폐를 끼치게 될까 두려운 마음, 마치 대단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 과장된 표현 때문에 누군가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이런 것들이 글 쓰는 것을 움츠리게 했다. 이성에 치우친 생각들, 편협한 속마음을 들킬 것 같은 두려움, 결과를 유추해 보는 냉정한 분석들도 글 쓰는 것을 방해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마치 의사인 나와 내 환자와의 거리가 좁혀진 것처럼 의사와 같은 독자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생기게 되었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환자의 증상을 눈치 챌 수 있는 것처럼 환자인 내 가슴속 못다 한 말까지 글의 행간을 통해 느껴줄 누군가가 있으리라는 희망이 생기고 용기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매주 열심히 글을 쓰게 되었다.

셈페르 파라투스(semper paratus), 할 일을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항상 원고는 마감 훨씬 전에 미리 보냈다. 한번에 두 주일분을 보낸 적도 있어서 가끔은 사건의 뒷북을 치는 글들도 있었다.

-그 모든 것 사과드리며 그 동안 제 글을 읽어주신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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