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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동창생
재일교포 동창생
  • 의사신문
  • 승인 2017.06.12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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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64〉

의과대학 동창생 중에는 지적 수준이 높고 생각과 행동이 비범한 사람들이 많다. 각자 다른 분야에서 열심히 지내왔겠지만 누가 가장 성공적이고 모범적인 인생을 살았을까? 의대 졸업 40주년 행사를 하면서 떠오른 질문이다. 의사자격시험에서 전국 수석을 한 급우가 있고, 업적과 제자가 많은 대학교수, 총장과 학장, 대학병원장, 의학 단체 회장, 이름 난 명의, 성공한 개업의가 된 친구도 있다. 또, 의료봉사에 열심인 동료와 기독교 목회자가 된 동창도 생각난다. 나는 여기에 일본에서 유학 왔던 동기생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1971년 서울대학교 의예과에 입학해보니 정원 외로 재일교포 학생 10명이 추가로 들어와 있었다. 이 학생들은 별도로 입시절차는 거쳤으나 아무래도 학력이 우리보다 떨어졌다. 실상은 우리 정부가 일본에 있는 동포를 위해 특별히 배정한 것이었다. 남북한 정부는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여러 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찍부터 북한은 도쿄,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까지 설립해 민족교육을 원하는 교포 자녀를 수용하고 있었다. 

우리 학창 시절에는 의과대학에 유급생이 유난히 많았다. 2년 전인 1969년부터 입학정원이 120명에서 160명으로 늘어난 것도 한가지 이유이었다. 상대적으로 실력이 낮은 학생들에게 엄격한 교수님들은 재시험 끝에 F 학점을 주었다. 의대에서는 모든 과목이 `전공필수'이어서 한 과목이라도 F를 받으면 유급하였다. 이런 일이 학기마다 반복되어 내가 의예과를 수료하고 본과에 와보니 1학년이 210명이나 되었다. 기존 강의실은 비좁아서 대강당에서 수업을 하였으나 강당의 작은 칠판은 글씨가 잘 안 보였다. 학생들은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남보다 일찍 등교하여야 했다. 

이런 힘든 학습 환경에서 우리 입학동기생 중 절반만 같이 졸업하였다. 피해를 가장 많이 본 학생이 재일교포이었다. 우리말이 능숙하지 않았고, 영어 실력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학습교재가 모두 영어 원서였고, `생리학'과 `정신과' 등 서너 과목 교과서만 우리말 이었다. 학생들은 모처럼 한글 교과서를 만나 편하게 공부했으나 교포 학생들은 영어 원서보다도 이해하기 어려웠단다. 결국 이들 중 여학생 두 명과 남자로는 L이 유일하게 우리와 같이 졸업하였다.

그 당시 L은 눈에 안 띄는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다. 우리 또래보다 네 살이나 많아서인지 의학공부가 만만치 않았다. 공부 부담 때문에 동아리 활동도 안하고 대인관계도 넓지 않았다. 항상 L과 나는 같은 책상에서 시험을 보았다. 일제 대형 탁상시계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전날 밤을 새워가며, 암기한 정답을 시간에 쫓기며 작성하곤 하였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 재시험은 더 자주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얕은 꾀의 몇몇 학생과는 달리 시험에서 부정행위는 생각도 안 하는 타입이었다.

한번은 여름방학에 기숙사에 찾아갔더니 그의 어머니가 일본에서 방문하였다. 우리 말이 능숙한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에게 오히려 L을 부탁하였다. 어머니는 그가 한국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나는 마침 여자친구가 있어 그 친구의 친구를 명동 다방에서 소개시켜 주었으나 의대생답지 않게 수더분한 그를 여자 측에서 탐탁해 하지 않았다.

졸업 후 L은 인턴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 그곳 의사면허시험에 합격하고 준텐도대학 병원에서 소아과를 수련 받았다. 특이하게도 이비인후과도 같이 공부하여 감기 환자에게 약 처방과 함께 아픈 목 인후에 국소치료도 해 주고 있다. 이 때문인지 도쿄에서 개업하자 감기 환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결국 동포 아가씨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처갓집이 큰 사업을 하는 부잣집이었단다.

어느 날 머리가 아파서 한 MR 정밀검사에서 뇌종양이 발견되었다. 아직은 이 종양이 더 커지지 않고 후유증도 없어 특별한 치료 없이 경과를 관찰하고 있다. 한국까지 와서 의학공부를 하고 일본 도쿄에서 잘 나가는 클리닉을 운영하고 있으나 가깝고 오래된 친구가 없어 외로웠단다. 여기에 뇌종양까지 생기니 그는 더욱 움츠려지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이때 탈출구로 찾은 것이 뜻밖에도 자동차 경주였다. 일본의 매니아답게 몰입하여 실제 선수가 되었고 경주용 포르쉐를 두 대나 보유하고 있다. 평소에는 운전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고 정비하여 차고에 보관하고 있단다. 경기용 차는 일반도로를 다닐 수 없으므로 특별한 트럭에 실어 이동하는데, 심지어는 이 트럭까지 장만하였다. 

경주 차는 한번 시합에 출전하고는 바퀴를 갈아야 하는데 이 가격 또한 만만치가 않단다. 아마 병원 수입은 모두다 여기에 쓰는 듯하다. 출전선수 팜플렛에 인쇄된 60대 후반인 그의 나이를 보고 모두들 오자(誤字)로 생각했단다. 다음으로 나이 많은 선수가 40대 이니 2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경기 성적이 항상 꼴찌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의대 동창생을 끔찍이 소중하게 여긴다. 일본에 찾아오는 급우를 먹이고, 재우고 때로는 선물까지 준다. 후지산 자락의 별장도 친구들에게 빌려준다. 동기 회보에 자기 병원 광고를 실어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우리 31회 졸업생은 특이하게 5년마다 기념여행을 같이 하는데, 이 행사에 꼭 참석한다. 일본 홋카이도에서 가진 졸업 30주년 모임에는 어머니도 오셔서 옛 회포를 풀 수 있었다. 참석자 모두에게 고급 청주를 선물로 준비하고. 

우리나라에 올 때마다 학생 때 지도교수(생리학 K 교수님)에게 드릴 일본 청주를 꼭 챙긴다. 허물없는 사이인 나는 옛날 생리학 재시험에서 지도교수가 구제해준 은혜를 갚는 것이냐고 농담을 하였다. 그는 껄껄 웃으면서 물론 아니고, 한국에서 배운 지식으로 일본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항상 감사한 마음이란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니, 그는 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에서도 탄탄한 인성을 바탕으로 매 순간마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여 왔다. 낯설고 힘든 환경을 이겨낸 노력형의 유학생이었고, 우수한 수련의였고, 지금은 환자에게 명망있는 의사이다. 또한 역경을 딛고 모범이 된 자동차 경주 선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만나면 진심으로 반가워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친구이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L 이야말로 비범하고 성공한 동기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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