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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극복기 <18> 마산동서병원 이종욱 부원장
암극복기 <18> 마산동서병원 이종욱 부원장
  • 홍미현 기자
  • 승인 2017.05.02 09: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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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로 인한 스트레스, 4번씩이나 암으로 찾아와

한 순간 잃게된 병원 찾기 위해 분노·과로로 직장암·위암 걸려
1년만에 임파선·편도암도…글·사진 취미로 감사하며 이겨내

〈평생을 바쳐온 병원이 한 순간, 내 눈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그리고 의사가 된 후 환자를 위해 진료와 치료에 매진했던 사람에게 병원이 어떤 의미인지 아시나요? 그때 찢어지는 제 심정, 이해하실까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를 믿고 찾아오던 환자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절망,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 등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일 술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앗아간 사람을 원망하고 분노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요, 결국 나에게 찾아온 건 `내 병원'이 아닌 날 저승으로 데려갈 `암'이었습니다. 세상 참 불공평하고 슬프지 않나요?〉

■평온하던 내 삶에 찾아온 `아픔과 불행'
이종욱 부원장은 마산에 터를 잡고 신경정신과의사로 이름을 날리며 남부럽지 않은 탄탄한 의사의 길을 가고 있었다.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병원을 지었고 2층엔 200석 규모의 공연장도 만들었다. 이 부원장은 매주 무료 음악회를 열어 환자들에게 음악치료도 했다. 

병원과 환자 치료밖에 모르던 그에게 불현듯 `아픔과 불행'이 찾아왔다. 2001년 어느 날 아침, 대변에서 피가 섞여 나왔다. 그는 그 길로 마산삼성병원을 찾아 장 내시경 검사를 했다. 담당의사와 함께 검사결과를 모니터로 보며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작은 포도알 크기의 종양 5개가 눈에 들어왔다. 초기가 아니라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이 부원장은 “내가 보기엔 종양이 너무 크고 산발적으로 분산돼 있어서 내시경 시술로는 어려워 보였다”며 “서울 적십자병원에 있던 후배를 찾아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집도의로부터 “항문을 잃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곤 “수술이 실패해도 좋으니 항문을 살려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의사라는 자존심상 주머니를 찰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부원장은 10cm 남짓한 직장을 모두 잘라내고 S자 모양의 대장과 항문을 바로 이어 `항문'은 살렸다. 그는 수술 부작용으로 변비로 고생하고 있다. 

■세상물정 어두워 한 순간 모든 걸 잃어
이종욱 부원장은 “`나는 암에 걸릴 성격이 아닌데 왜 이런 시련이 왔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기를 당한 후 모든 걸 잃으면서 암이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90년대 말, 이 부원장은 여느 때와 같이 환자 진료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절친했던 환자가 공장을 개업하면서 만든 법인체에 이사로 참여해 줄 것을 요구하며 서류를 가져와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며 “서류 내용 중 `27억원'이란 문구가 있어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형식적인 것이라는 그의 말에 도장을 찍어 보낸 것이 큰 화근이 됐다”고 토로했다. 

2년 후 자동차 부품공장에 부도가 났다. 이 부원장은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었기에 아무런 걱정을 하고 있지 않았다. 법원으로부터 `병원이 경매로 넘어갔다'는 통보가 날아 왔다. 이 부원장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병원을 담보로 이 부원장의 명의로 27억원과 185만불이 대출됐던 것이었다. 세상 물정 몰라 안일하게 대처했다가 하루아침에 병원 건물이 경매로 넘어가게 된 것이었다. 

이 부원장은 그 길로 법원에 달려가 감정을 했다. 감정 결과 위조된 도장으로 대출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50∼60억의 상당의 시세였던 병원이 27억원 때문에 경매에 넘어가게 생겼다는 사실에 하루하루를 눈물로 밤을 지샜다. 매일 같이 술만 마시고 밥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다. 오로지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병원을 찾기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했다. 도장이 위조됐다는 것도 밝혀냈지만 법원은 그의 편이 되어 주지 못했다. 절망 속에 살던 어느 날, 병원 건물을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부원장은 집을 포함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고, 친구가 1억 마련하고 또 한 친구는 자신의 공장 담보로 9억을 대출해주었다. 은행에서도 9억원을 빌리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모아 병원을 되찾았다. 

그는 짜장면 한 그릇으로 버티며 매일 오후 9시까지 진료를 봤다. 하지만 매달 1천만원씩 지출되는 은행 이자를 감당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순간 그는 `이러다 병이 오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열심히 살았는데, 다시 찾아온 `암들'
그의 생각은 빗나가지 않았다. 병원을 다시 찾기 위해 앞만 보고 달리던 그에게 또 한 번의 시련이 왔다. 매일 마신 술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서인지 속이 쓰려왔다. 2000년 뜨거운 여름 햇볕을 받으며 이 부원장은 위 내시경을 했다. 검사 결과 포도알 만한 종양이 위에 퍼져있었다. 

이 부원장은 위를 절제했고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엔 답답함이 있었다. 병원 운영이 벅찼던 그는 어렵게 되찾은 병원을 폐업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폐업 후 창원병원에서 연락이 와 1년간 근무를 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이 부원장은 마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어느 날 마산 시내에서 사기범과 마주쳤다. 이 부원장은 사기범이 보도블럭에서 부딪쳤는데, 사기범은 이 교수를 본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 부원장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수천, 수백만 가지의 생각이 오갔다”면서 “`내가 감방에 가더라도 저 놈을 죽이고 싶다. 내가 너 때문에 지금 어떻게 살고 있고 살아왔는데' 하는 억울한 마음에 충동적인 행동을 할 것 같은 심리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너 하나 죽여 뭐하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한번도 어려운 암, 편도와 임파선 방문
이 부원장은 그렇게 마산동서병원에서 환자 진료에 매진하며 살았다. 그러나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아니면 실수였을까. 한 번도 찾아오기 힘든 암이 1년 만에 또 나타났다. 

이 부원장은 “면도를 하다가 목에 여드름 같이 녹두알만한 작은 멍울이 만져졌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다”며 “이 멍울이 점점 더 커져 검사를 하니 `임파선암'이었다”고 말했다. 

임파선암은 혼자 생기는 암이 아니다. 어딘가에서 전이된 것이다. 찾아보니 임파선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편도선암으로부터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임파선에 암이 다 퍼져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다. 

이 부원장은 “직장암과 위암이 발견됐을 때는 죽을거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서까지 써서 준비해 놨다”고 한다. 3시간 반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됐던 그의 수술은 7시간 만에 끝이 났다. 

부분절제가 아닌 근원적인 절제로 왼쪽 편도선을 거의 걷어냈다. 임파선에서 37개의 암 종양을 걷어냈다. 이 경우 목소리가 안 나오거나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는 수술을 마친 후 마취가 깨기도 전에 회복실을 나오면서 목소리가 나오는지부터 확인했다고 한다. 

이 부원장은 “수술 후 왼쪽 목에는 감각도 없었고, 목소리도 잘 안나왔다. 내가 환자를 진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병원도 그만두려 했다”며 “하지만 목이 반이 아직 남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반의 힘'이 위대하다는 생각에 환자를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힘겨운 항암치료를 40회나 받았다. 그 사이에 머리털이 다 빠지고 코털마저 빠졌다. 이뿐 만이 아니었다. 방사선치료를 너무 많이 받다 보니 뼈가 삭아 코와 구강 사이에 구멍이 뚫리기 직전 수술로 막아야 할 정도였다. 

이 부원장은 야구를 좋아해 진료실에서도 컴퓨터로 야구중계를 보곤 한다. 그는 “야구선수가 침을 뱉는 화면이 나오면 `저 아까운 침을…'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긍정의 힘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 부원장은 성악가가 꿈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로 고려대 의대를 나와 의사가 됐다. 그만큼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음악의 꿈을 접지 못해 과거 병원 한 층에 공연장을 만들어 환자들에게 매주 음악을 선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합창단 활동도 하며 가곡도 직접 지어 불렀다. 그러나 4번의 암을 극복하는 동안 그 좋았던 목소리를 잃었다. 환자 진료를 할 때에도 물을 옆에 놓고 연신 마셔가며 환자를 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순간도 환자를 소홀히 보지 않는다. 전국에서 그를 찾아오는 환자를 위해 30분 넘게 꼼꼼히 진료한다. 

이 부원장은 “암의 근본적인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말한다. 그는 “만일 자신이 환자로부터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암은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부원장은 4번의 큰 아픔을 겪으면서 그만큼 삶의 소중함도 깨닫게 됐다.

그리고 그는 편도선암 수술 때 써놓은 유서도 찢어버렸다. 이 부원장은 암을 극복하기 위해 특별히 챙겨먹은 음식은 없다고 한다. 뭐든지 골고루 먹고 암 환자에게 좋지 않은 술도 가끔 마셨다. 그는 술이 항암제 역할을 했다며 농담을 할 정도다. 이 부원장은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쓴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살아있다'라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사는 것이 암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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