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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감의 계곡(Uncanny Valley)
비호감의 계곡(Uncanny Valley)
  • 의사신문
  • 승인 2017.04.10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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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風書風 〈62〉

1973년에 개봉하여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영화 〈엑소시스트 The Exorcist〉를 떠올려보라. 어떤 장면이 가장 무서웠는가? 소녀의 몸에 숨어있던 악마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기괴함, strange or weird)? 아니다. 관객들이 가장 크게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던 순간은, 주인공 린다 블래어(Linda Blare)의 목이 비틀어져 360도 돌아갈 때였다(섬뜩함, uncanny). 그 당시 〈엑소시스트〉가 관중들에게 미친 심리적 영향은 그야말로 대단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1919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Das Unheimliche〉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Unheimliche(uncanny)라는 의미를 심리학적으로 재해석했다. 섬뜩함을 뜻하는 독일어 `unheimliche'는, 평소의 일상적이고 친숙한 것들에서 갑자기 치솟는 공포감을 의미한다. 이 논문을 통해 프로이트는 비일상적인 기괴함으로부터 일상 속의 섬뜩함을 구별해 내었다.

섬뜩함이란 과거의 어떤 사건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 억압의 과정을 통해 멀어졌다가, `갑작스런' 잠재의식의 발현으로 자신의 삶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섬뜩함은 처음 보는 낯선 것을 마주했을 때의 기괴함과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영화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처럼 분리된 인체의 한 부분이 움직일 때처럼, 평소에 익숙한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낯선 모습이나 자연스럽지 못한 행태로 나타날 때 대단히 무섭고 섬뜩한 공포심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이다. 

`일상의 비정상화'라는 경험적 자아의 심리적 현실은, 문학이나 예술의 장르에서도 작가의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단골 소재가 되기도 한다. 친숙한 것으로부터 낯선 느낌이 묻어나는 고흐(Vincent van Gogh)의 그림, 특히 생의 말기에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그린 `자화상'에서의 낯선 이상함은 왠지 모를 섬뜩함으로 다가온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Edvard Munch)의 작품 〈절규, the Scream〉는, 작가 자신이 피요르드 해안의 평안한 석양에서 불현듯 마주친 내면의 공포와 좌절감을 섬뜩한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에서는, 어느 날 갑작스레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택하게 되는 주인공의 끔찍한 심리적 현실을 본다. 그런 `unheimliche'는, 우리의 익숙하고 평온한 일상이 `내재된 의식의 근원'과 만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1970년 일본의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政弘)는, 로봇이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흡사하면 괜찮지만 어중간하게 비슷했다간 오히려 극도의 반발심이나 거부감을 유발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거부감을 느끼는 구간의 호감도를 그래프로 그려보면 계곡 모양이 된다고 해서 이를 비호감의 계곡(Uncanny Valley)이라고 명명했다. 로봇이 외모, 행동에서 인간의 유사성에 따라 호감도가 계속해서 오르다가, 인간과의 유사점이 특정한 정도를 넘어서서 이상한 모양새를 보일 때 호감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오히려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로봇 연구의 실험 참가자들은, 생김새는 인간을 닮았는데 움직이지 않으면 시체를 연상시키고, 어색하게 움직이면 호감도의 폭락은 더 심해지는데 이는 좀비를 연상시킨다고 토로한 바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SF 영화 `AI(Artificial Intelligence)'는, 인조인간 데이비드와 인간들과의 감성적인 관계 설정이 주된 주제이다. 인간과의 차별화로 느끼는 데이비드의 애정결핍증,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려는 해체의 공포, 인간이 되기 위해 데이비드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자신을 만든 과학자의 연구실이다. 그곳에서 완제품이 되기를 기다리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혼비백산, 데이비드는 죽음에 이르는 엄청난 충격을 느낀다. 로봇과 인간이라는 정체성의 혼돈, 우리는 인공지능 가상현실의 uncanny valley에서 미래의 또 다른 윤리적 현실과 만난다. 

프로이트의 〈Das Unheimliche〉는 대중 문학과 미술, 영화의 주요한 소재가 되어왔으며, 이제는 uncanny valley의 로봇과 AI 가상현실로까지 그 모습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섬뜩함과 비호감의 심리학, 지난해 내가 처음 겪은 지진의 기억은 트럭이 지나는 일상의 가벼운 지축의 흔들림에도 갑작스런 공포와 전율을 느끼게 한다. 개인이나 집단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하는 섬뜩함의 심리적 현실은 작금의 우리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시대적 상황에서 비롯하는 uncanny valley는 개인과 집단 상호 간의 분노와 적대감으로 이어지고, 심각한 체제 분열적인 양상은 구체적이며 위협적이다.

한국전쟁 이후로 북의 공산당에 대한 반발 심리로 붉은 색깔이 사회적인 금기처럼 작용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왔던 우리 세대는 지금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수첩이나 메모지에 조차도 붉은 색을 쓰지 않는다. 선홍빛으로 넘쳐나는 공산당의 구호나 평양의 군중대회를 연상하는 섬뜩함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노조와 전교조 등 운동권 시위대의 현장에는 푯말, 스티커, 깃발 모든 게 붉은 색 천지다. 

지난해 탄핵정국이 촉발한 촛불 집회에서조차도 그러함은 참으로 유감이다. 더더욱 시위대의 행진에 등장한 단두대와 장대에 걸린 참수된 대통령의 목을 보고는 아연실색, 엑소시스트의 한 장면이 떠오르는 테러 수준의 충격적인 장면이다. 이들을 말리는 정치인도, 이들을 심도 있게 꾸짖는 언론도 없었다. 여자 대통령의 나체 그림을 국회전시관에 걸고 있는 그런 부류의 정치인이 한 명 뿐일까. `정치적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종편 방송의 3류 패널들을 보면 구역질이 날 정도이다. 최소한의 인간적 윤리라도 지키며 비판하는 것이 정치이고 언론이 아닌가.

패권주의 대륙에서는 사드 배치에 대한 그들의 종속적인 기대를 저버리는 한국에 대해 그들의 대국(大國) 심리는 잔인할 정도로 폭력적이다. 롯데 매장의 상품을 내 던지고, 길거리에서 현대 차를 돌덩이로 내리치고, 우리의 태극기를 짓밟는 행태들… 대국주의 쇼비니즘이 지배하는 중국이라는 나라, 2천 년 역사의 섬뜩한 기억을 일깨운다. 또한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하는 트럼프 정부가 미군 주둔 비용의 과도한 인상을 요구하고, 다가올 FTA 재협상에서는 또 어떤 비수로 우리의 등 뒤를 겨눌까. 짧은 기간에 눈부신 경제발전이라는 만족감에 취해 대륙과 해양 세력이 교차하는 반도적 현실을 우리는 오랫동안 잊어온 게 아닐까? 

섬뜩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나가사키나 히로시마를 여행하면서 핵무기의 파괴력을 실체적 자료와 유물, 유적을 직접 접해 본 사람들은 북한 독재자의 손에 주어진 핵무기 탄두의 위협이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두렵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민주주의 체제와 파시즘 독재정권과의 대화와 협조는 항상 상대의 속임수로 끝났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이다. 사드 배치를 연기하자는 어부지리 권력의 민주당, 전쟁의 무자비한 파괴적 폭력성에 대해 만성불감증에 빠진 한국사회, 과연 uncanny valley가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일상의 비정상화 보다 아무런 대책마저 사라진 `비정상의 일상화'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경험과 정치 성향을 가진 개인과 집단의 내면에 비치는 심리적 현실은 서로 간에 현격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주의 사회가 지켜야 할 올바른 가치이며 덕목이다. 오히려 억지 통합과 화해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이중적 위선이다. 인종, 종교, 풍습이 다른 선진 다문화 국가들에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저력은, 차이를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신념과 확고한 국가적 안보관에서 비롯한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는 그의 비극 〈바카이〉에서 `신이 그들을 멸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미치게 만든다.'라고 했다. 내우외환의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사회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점점 이성이 마비되어 가는 것일까. 정치적 선동자들은 시민사회를 보수와 진보, 좌와 우, 세대적 갈등의 적대적 이분법 관계로 몰아감으로써 작금의 우리 사회가 당면한 대립구조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정치적 치킨게임, 우려되는 것은 칼 융(C. J. Jung)이 말한 민중의 집단무의식에 유전자처럼 내재하는 광기와 폭력의 섬뜩함이다.

`4월은 잔인한 달…, 지난 겨울이 오히려 따뜻했다.'라는 엘리어트의 `황무지' 시구(詩句)가 가슴 깊이 스며드는 4월이다. 세월호, 천안함을 정치적 이슈로 만들었던 가짜 뉴스와 음모론, 기회주의적 언론이 판치는 사회,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포퓰리즘과 온갖 작위적 선동이 어우러지는 또 한 번의 선거 지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민주주의의 꽃이며 축제가 되어야 할 선거를 왜 나는 지옥이라고 말하는가.

극한적 대립으로 맞서는 양극의 사회에서 선거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요식 행위일 뿐, 애초부터 사회적 정의 따위가 필요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대선처럼 선거의 명백한 결과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일부 집단세력의 비민주적인 행태, 환골탈태의 반성 없이는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 불복의 추억에 대한 학습효과는 다가올 선거 이후의 패자측 집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려한다.

역사는 과거의 객관적 사실과 증거로 현재의 불안정성을 보완하지만, 미래는 현실에 기반한 불확실성의 예측일 뿐이다. 구태에 젖은 보수는 스스로 낡은 사고적 프레임을 버릴 수가 없고, 기득권화 되어버린 진보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식이나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공위(空位)의 시대', 오늘의 한국 사회는 uncanny valley의 깊은 수렁 속에서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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