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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
  • 의사신문
  • 승인 2017.03.0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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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이야기 〈387〉

■뉴에이지풍의 분위기가 짙게 느껴지는 음악

〈6개의 그노시엔〉는 〈3개의 짐노페디〉 직후에 작곡되었다. 1890년 처음 출판했을 때는 〈3개의 그노시엔〉이었지만 사티가 세상을 떠난 후에 전기 작가였던 로베르 카비가 1889년에서 1897년까지 사티가 죽기 전에 작곡한 세 곡을 더 찾아내어 출판하면서 현재의 피아노곡집 〈6개의 그노시엔〉이 완성되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그노시엔'은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뜻하는데 종교적이고 중세적인 명상, 뉴에이지풍의 분위기가 짙은 음악을 말한다.

이 작품의 악보에는 마딧줄이 없다.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의 테두리에 익숙하지 않으며 마딧줄이 없는 것은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케 한다. 침묵과 음악의 중간에서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은 몽환적이고 묘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이 작품의 각 곡 머리에는 사티가 붙여 놓은 독특한 지시어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제1곡 Lent(느리게), 제2곡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 제3곡 Lent, 제4곡 Lent, 제5곡 Modéré절제해서), 제6곡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의 제목에다가 곡 중간의 지시어들은 더 특이하게 `매우 기름지게', `혀끝으로', `구멍을 파듯이'라고 썼다.

당시까지 주로 사용하던 이탈리아어를 배제한 채 사티는 프랑스어를 사용하였고 이후 그런 경향은 더 강해졌다. `치통을 앓는 나이팅게일처럼', `너무 많이 먹지 말 것', `난 담배가 없네. 다행히 담배를 피우지 않는 군'같이 곡 제목도 점점 도발적으로 변한다.

1910년대에는 `뻔뻔함', `유쾌한 절망', `바싹 마른 태아', `개를 위한 엉성한 전주곡' 같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 밖에도 그의 악보에 특이한 언어들이 등장하는데 `의미있는 장난'으로 해석된다. 그 언어들은 당시의 음악적 주류나 기존 고정관념에 대한 냉소와 풍자로써 도발적인 현대성을 느끼게 한다. 사티는 유기견들을 집으로 데려와 돌보곤 하였는데 친구인 시인 장 콕토에게 “난 개들을 위한 음악을 쓸 거라네”라고 말할 정도였다.

사티의 또다른 곡인 〈가구음악(Musique d'ameublement)〉이 1920년 3월 파리 바르바장주 갤러리에서 막스 자콥의 연극을 공연하던 중간에 초연되었다.

이 곡도 〈벡사시옹〉처럼 짧은 프레이즈를 계속 반복하는 음악으로 연극의 중간휴식을 위한 배경음악이었다. 공연의 프로그램에는 `관객들은 음악이 흐르는 동안 연주에 절대 신경 쓰지 말 것. 걸어 다니고 이야기하고 음료수를 마실 것'이라고 적혀있었다.

“예술은 거창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라며 사티는 `반(反)예술 선언'을 한 것이었다. 예술가들의 과잉된 자의식과 함께 청중이 예술을 경배하는 태도, 그 모든 것을 사티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후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작곡가 다리우스 미요, 시인 장 콕토, 화가 파블로 피카소, 사진작가 만 레이 등은 이에 공감하여 에릭 사티와 같이 작업하기도 하였다. 

“구름, 파도, 물의 요정, 밤의 향기를 이제 집어치우자. 우리는 지상에 뿌리내린 일상의 음악을 필요로 한다.” 친구인 장 콕토의 이 발언은 그들의 예술관을 짐작케 한다. 또 1917년 사티가 작곡한 발레음악 〈퍼레이드〉의 무대미술을 맡았던 피카소도 “내 그림에 끌어들인 대상은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물건이다. 물주전자, 맥주 컵, 담배 파이프, 쌈지담배 한 꾸러미, 그릇, 갈대로 엮은 방석이 놓여 있는 부엌 의자, 늘 대하는 식탁 등. 나는 그 누구도 듣지 못했거나 변형시킬 수는 더더욱 없는 희귀한 대상을 얻어내려고 애쓰지 않는다. (중략) 예를 들면 나는 루이 15세의 안락의자를 절대로 그리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대상이지 `누구나'를 위한 대상은 아니다.” 즉, 사티의 음악은 기존의 음악적 주류들, 당시 유행하였던 바그너풍의 `중후 장대함'이나 드뷔시풍의 `모호함'에 대한 반발이자 풍자였다. 

△제1곡 Lent(느리게) 편안하고 조용한 곡으로 최근 CF에서까지 사용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곡이다.

△제2곡 Avec etonnement(놀라움을 가지고) 앞 곡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제3곡 Lent 앞의 두 곡과 비슷한 느낌이다. 처음 사티가 출판한 처음 세 곡에는 저음부의 완전화음 위를 선법적인 색채를 띤 선율이 진행된다.

△제4곡 Lent 왼손으로 짚어 나가는 저음이 살짝 무거워지는 듯하다.

△제5곡 Modéré(절제해서) 좀 더 환한 느낌으로 돌아온다.

△제6곡 Avec conviction et avec une tristesse rigoureuse(확신과 절대적 슬픔을 가지고) 조용하지만 밑으로 그리 무겁게 가라앉는 슬픔은 아니다. 

■들을 만한 음반
△알도 치콜리니(피아노)(EMI, 1966)
△파스칼 로제(피아노)(Decca, 1983)
△라인베르트 디 레우(피아노)(Philips, 1974)
△장 이브 티보데(피아노)(Decca,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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