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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사회장단 칼럼] 개원 22년차의 단상(행복한 동행, 새로운 도약)
[구의사회장단 칼럼] 개원 22년차의 단상(행복한 동행, 새로운 도약)
  • 의사신문
  • 승인 2017.02.2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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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배 강서구의사회 회장

얼마 전 1년 정도 함께 일했고 새로 개원한다고 그만 두었던 L부원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전히 바쁘게 잘 지내냐며 새해 인사를 한다. 성실하게 환자를 잘 보고, 사업적인 마인드도 있어 보여 오랫동안 함께 일하기를 바랐던 후배 내과의사이다. 군대 마치고 펠로우 2년 과정 수료 후 1년간 우리 천내과에서 봉직의로 일했었다. 어차피 개원을 염두에 두고 개인의원에서 경험도 쌓을 겸 잠시 페이닥터로 근무한 것이니 척박한 개원환경에도 불구하고 좋은 개원자리가 나왔다며 훌쩍 떠났던 터다.

반갑기도 하고 근황이 궁금했다. 작년 8월 동대문 근처에 공동 개원하려고 준비했던 동료의사와 의견이 맞지 않아서 결별하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기도 변방의 소도시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우선 두 아이의 아빠인데 주말부부로 살 수밖에 없는 점이 못내 안쓰러웠고, 지방이라서 직원 구하는 것도 어려운 것을 포함해서 개원 초보자로서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힘든 점들에 대해 공감이 갔다. 연말에 독감 유행 및 건강검진 수요가 있어서 그나마 반짝 늘었던 환자수가 새해 들면서 급감했다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천내과에서 봉직의로 근무할 때가 맘도 편하고 여러모로 좋았는데 괜히 개원해서 고생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그래도 천 원장님이 해주었던 개원 경험담이 위로가 되고 있다고도 한다.

22년 전 처음 개원했던 그 때가 엊그제 일처럼 머릿속에 다가온다. 4년간의 내과 전공의 수련 마치고 강서구에 있는 준종합병원에서 1년간 봉직하다가 이곳 가양동에 터를 잡았다. 그 당시에는 공공연했던 연이자 16%의 은행 대출을 거액 받은 중압감도 있었지만 설렘과 희망이 있었다. 그런데 문만 열면 환자가 들끓을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첫날 우리 아들 감기약 처방한 것을 포함해서 환자는 8명뿐이었고, 그 후로도 수주 동안 환자수가 한자리수를 벗어나지 못했다. 점심시간에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혼자 먹는데 가슴이 턱 막혀 밥이 목에서 넘어가지 않았다. 은행대출 이자, 의료장비 리스료, 직원 월급 등의 고정 지출과 수입을 어림잡아보고 “이렇게 파산하게 되는구나!”하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면 아찔해진다. 

오래 개원하다 보니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이 있게 마련이다. 13년 전에는 심평원 실사(현지조사)를 받았다. 임상병리사가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간호조무사에게 심전도검사, 폐기능검사 등을 도와주라고 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부당청구액 환수와 업무정지에 갈음하는 4배의 엄청난 과징금, 2주간의 면허정지가 내려졌었다.

한번은 평소 심부전으로 치료받던 할머니 환자가 영양수액제를 맞던 중에 호흡곤란과 청색증이 나타나 산소를 공급했지만 나빠져서 기도삽관을 시도하다가 실패했고, 119 구급차를 호출하여 환자와 동승해서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인계하고 돌아왔었다.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전하는 가족들의 원망스러운 눈초리가 환자 사망 시에 닥쳐올 분쟁을 예고하고 있었으나 이 환자는 다행히 회복되어 퇴원하게 되어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어떤 당뇨 환자는 6개월간의 폐결핵 치료가 끝나는 날 고맙다는 인사 대신에 리팜핀에 의한 시신경염으로 시력 감소의 책임을 묻는다며 수억 원의 배상금 청구서를 던져놓고 갔다. 법률적인 자문을 받은 결과 천내과의 의료과실이 없다고 판정 받았다.

개원의사 생활 중에 나를 힘들게 했던 사건이나 환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다수의 사랑스런 환자들은 나에게 감사한다. 오늘도 늘 다니던 할머니 환자가 나의 손을 꼭 잡으며, “원장님 항상 건강하셔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가신다. 올해 101세가 되신 천내과의 최고령 할아버지도 오실 때마다 웃으시며 감사함을 표한다. 근래 몇 개월째 안보이시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환자들 경우에는 가족분이 오셔서 얼마 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그동안 잘 돌봐주셔서 감사했다는 말을 남긴다. 그럴 때는 20년이 다 된 진료챠트를 별도의 보관 장소로 옮겨 놓으며 착잡한 심경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 강서구 내과 선배님 중 한분은 1930년생으로 올해 88세이신데 매일 진료하시고 모임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신다. 후배들의 귀감이시다. 과거에 여러 번 의사들 모임의 회장을 맡으셨고 나는 총무 등 이사로 함께 일했던 때가 많았는데 이젠 모두 추억이 되었다. 나도 이 선배님처럼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30년은 더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연세가 많으신 선배의사 중에 개원을 접으신 경우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일을 그만두고 가족들과 여행 다니거나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시는 분도 있고, 봉사활동에 열심이신 분도 있고, 요양병원 등에서 의사로서의 직업을 지속하시는 분도 있다. 

최근 내시경 장비를 새로 교체했다. 내시경 본체 2개, 대장내시경 1개, 위내시경 3개 등 총 비용이 1억 5천만 원이다. 우리나라의 내시경검사 수가를 따지면 무모한 투자이다. 하지만 22년 동안 한결같이 나를 믿고 따라주는 강서구 지역 주민들의 건강과 편의를 위한 보답 차원에서 최신 장비를 마련하는 것이므로 주저 없이 기쁘게 거금을 지출했다. 대부분의 동년배 의사들은 현재의 열악한 의료 환경이 앞으로 더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며 새로운 투자에 소극적이고 현상유지나 잘 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젊고 실력을 인정받은 후배 의사들 중에 개원하면서 의욕적으로 과감한 시설투자를 했다가 낭패를 보고 폐업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심심찮게 봐왔던 터라 이해가 간다.
그렇지만 어찌하겠는가? 건강 100세 시대의 건강한 이웃 주민과 함께 가야할 건강한 의사로서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엊그제 강서구청에서 주관한 강서구 신년인사회에 참석했다. 구청장을 비롯하여 지역구 국회의원 등 많은 지역유지와 구민들이 참석하여 명품도시 강서구 만들기를 외쳤다. 연단 앞에 큼지막한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멋진 구호이다.

“행복한 동행, 새로운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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