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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치기와 아버지
소매치기와 아버지
  • 의사신문
  • 승인 2017.01.2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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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55〉

*이번 설날 연휴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분들에게 주의하시라고 이 글을 드립니다.

중학생 때 일이었다. 어느 일요일 날 아버지가 친척 아저씨에게 돈을 전달하는 심부름을 시켰다. 이런 중요한 사명을 처음 맡게 된 나는 잠바 안주머니에 돈 봉투를 깊이 넣고 긴장하면서 버스를 탔다. 휴일이지만 비교적 사람이 많은 차 안에서 소심한 나는 몇 번이고 봉투를 손으로 확인하였다. 내릴 정거장이 되어 문으로 가는데 사람이 많아 힘들었다. 버스에 내리자마자 윗옷 안주머니를 뒤져보았는데 기가 막히게 봉투가 없어진 것이 아닌가! 내리기 직전까지 확실하게 봉투가 있었는데….  

내가 처음 당한 소매치기였다. 어릴 때라서 충격이 커서 그 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소매치기란 남의 소지품을 손이나 면도날을 이용하여 교묘한 방법으로 훔치는 절도행위를 말한다. 또 이 짓을 하는 사람을 지칭하기도 한다. 폭행, 협박으로 훔치는 강도나 물건을 낚아채 달아나는 날치기인 노상강도와는 조금 다르다. 대부분 사소한 금액을 잃기 때문에 소매치기는 뛰어난 솜씨나 지략의 재미있는 대결이라고도 여겨지나 실상 엄연한 범죄행위이다.

어른이 되고 해외여행을 자주 하면서 소매치기에 대한 지식도 조금 생겼다. 특히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같은 유럽이나 태국, 베트남 같은 동남아시아를 여행할 때 친지나 동료들의 경험담과 조언에서 지식을 쌓아갔다. 특이하게도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에서는 아주 안전하다. 내 생각에 아랍권 국가에서는 형벌이 엄청나게 심하기 때문이다. 소매치기를 하면 팔목을 자르는데 굶어 죽기 직전이 아니면 누가 이 짓을 하겠는가? 

나는 소매치기가 볼 때에 아주 좋은 목표물이다.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는 중년의 아시아인이 몸은 가냘픈 데에다가 힘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나를 잘못 본 것이다. 의과대학생 때에는 야구 동아리에서 내야수도 한 적이 있어 비교적 행동이 빠른 편이다. 

3년 전 이탈리아 로마에서 생긴 일이다. 유럽학회 참석 후 동료 8명이 한 그룹이 되어 로마를 방문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그곳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경험담을 많이 알려주었으나 아무 일도 없이 마지막 날이 되었다. 지하철을 타면서 그동안 얻은 지식을 사용 못했다고 농담하면서 차에 올랐다. 그런데 사람으로 밀려 들어갔으나 실상 객차 안은 한산한 것이 아닌가! 문득 친구들에게 들은 상황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주머니를 보니 내 양복의 왼쪽 포켓에 누구의 손이 들어와 있었다. 얼떨결에 내 왼손으로 꽉 잡았다. 손을 따라 시선을 올려다보니 30대의 날씬한 청년이 나를 보고 씨익 웃고 있었다. 소매치기범인 것이다. 그 웃는 얼굴에 약간의 분노가 일어나 나도 모르게 오른손 주먹으로 배를 어퍼컷으로 치면서 더듬거리며 영어로 말했다. “Where are your fingers?” 더 멋있는 문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의 이 강력한 반응에 놀란 그는 잠시 당황하더니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하였다. 아마 왜 생사람을 잡느냐는 뜻일 것이다. 나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 우리 팀을 찾아보니 나는 객차 한쪽 구석에 몰려있고 친구들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치기배들이 나를 한쪽으로 몰은 것이다. 곧 이곳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관광가이드가 이쪽으로 와서 소매치기와 소리 높이 언쟁을 벌였다. 세 명의 악당들은 다음 역에서 황급하게 내렸다. 물론 내 지갑은 안전하였고.

또 한 번은 파리의 지하철에서였다. 전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있어 모두 계단을 빠르게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앞에서 어떤 청년이 계단에서 구두 끈을 매기 시작하였다. 별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람을 피하여 들어오는 차를 타려고 하는데 오른팔에 맨 가방이 땅겨지는 것 같았다. 지하철을 타고 걱정이 되어 가방을 보니 이미 바깥 주머니는 열었으나 다행히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보조지퍼는 미처 손대지 못한 상태였다.

이상이 내 경험담이다.

옛날에는 대중교통, 병원, 백화점 등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서 손으로 돈, 지갑이나 소지품을 훔쳐가는 단독 범행이었다. 그러나 점차 조직화 되어 지금은 상대방의 얼을 빼는 바람잡이가 있다. 지갑이나 소지품이 있는 쪽의 반대편을 바람잡이가 작업을 해 주의를 바꾸게 한 사이에 다른 사람이 목표물을 채가는 것이다. 반대쪽 물건이나 신체를 잡아당겨 관심을 끌거나 옷에 아이스크림, 케첩, 겨자 같은 이물질을 묻혀 당황하여 닦으면서 방심하는 순간을 노린다.

내가 들은 가장 수준이 높은 소매치기는 경찰관을 사칭하는 형태였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한 두 명의 동료가 번화가에서 걸어가는데 어떤 여행객이 지도를 보다가 이들에게 다가와 물어보았다. 잠깐 같이 지도를 보고 있는 순간 경찰관이 나타났다. 정복을 입은 경찰은 이 사람이 마약장사꾼이라면서 지금 사고 팔지 않았냐고 질문하였다. 놀란 여행객은 전혀 아니라고 반문하고 경관은 신분증과 지갑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였다. 확인 후 지갑을 건네주며 조심하라고 충고까지 한 경찰과 헤어진 후 이상한 느낌이 들어 지갑을 열어보니 100달러 지폐 여러 장을 감쪽같이 빼어갔단다. 

그러면 이러한 경우 경찰이라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외교부 홈페이지에 있는 해외 안전여행 지침에 따르면 진짜 경찰은 검문 시 여권만 요구하지 지갑을 뒤지지는 않는다고. 또 의심이 되면 경찰서에서 이야기하자고 말하라고 한다. 위험한 지역은 홀로 여행을 하지 않고 단체로 다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중학교 수학여행 중에 담임선생님이 재미로 질문한 퀴즈가 있다.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수억 원의 큰돈을 서울로 가져가는데 이를 노리는 소매치기를 피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 무엇일까? 이런저런 방안을 학생들이 제시했으나 정답이 아니었다. 돈을 가방에서 꺼내어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아 두란다. 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 돈을 주시하고 있어 치기배는 어떻게 할 수 없고 돈 주인은 잠을 자고 있으면 서울에 도착한다. 기차를 내려 역에서도 같은 칸 승객들이 둘러싸고 신경 쓰며 가기 때문에 소매치기가 틈을 찾지 못한다. 관심을 빼앗기면 당하듯이 관심이 많을수록 안전한 것이다.

내가 처음 당한 소매치기는 아주 전형적인 예이다. 우선 내가 돈 봉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내 행동으로 알려준 셈이다. 잠바에 안주머니는 지퍼가 없으면 바깥주머니인 거나 마찬가지이다. 손가락 끝으로 쉽게 빼올 수 있기 때문이다. 버스에서 내릴 때 일부러 힘들게 해 내 주의를 다른 곳에 쏠리게 하고 훔친 것이다. 

그 당시 사색이 된 얼굴로 실수를 고백하는 나에게 아버지는 뜻밖으로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인생 좋은 경험을 했구나.” 아마 큰돈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면 우리 아버지가 스케일이 큰 분이었나? 실제로 아버지는 항상 다정하고 언제나 우리 힘이 되었다. 치기배들이 기승을 부리는 황량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주던 아버지! 26년 전에 너무나 일찍 돌아가신 아빠가 갑자기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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