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정유년 신년특집 기념수필 - 할 말은 많은데
■2017년 정유년 신년특집 기념수필 - 할 말은 많은데
  • 의사신문
  • 승인 2017.01.02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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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부부의 순애보'
전경홍 한국의사수필가협회 회장

세영이의 할머니는 오랫동안 우리 병원 단골 환자다. 고혈압, 당뇨병, 심장 부정맥증으로 진료를 받아오다가 한 삼 년 전부터 서울에 있는 A병원 순환기내과를 다닌다. 삼 개월에 한 번 정도 처방한 약을 복용하면서 우리 병원에는 가끔 들러서 혈압을 재곤 했다.

작년 6월에 심장이 벌렁거린다며 진료실에 오셨다. 청진을 해보니 부정맥이 심했다. 호흡이 가쁘고 현기증이 종종 났다고 하여 검사를 하였더니 심전도에 나타난 심장파장이 좋지 않았다. 주치의사가 진료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서울로 가 보시라고 권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에 메르스 사태로 외래진료를 하기가 어려우니 오는 날 응급실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간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약 하루 분이 남았을 때 오라고 했다. 그런데 3일 후 아침 9시 반경에 세영이 할아버지한테 다급한 전화가 왔다.

“세영이 할머니가 쓰러졌는데 어찌하면 좋은가?” 
119를 불러서 병원응급실로 가라고 하고 환자 진료를 하기에 당장은 가보지 못했다. 오후에 진료를 마치고 D병원 중환자실을 찾아갔다. 

3개월이 지난 지금도 가끔 웃기만 할 뿐 여전히 말을 못하고 있다. 음식은 유동식을 튜브로 공급하고 있고 기저귀를 차고 소 대변을 보고 있다. 그렇지만 환자가족들은 회복되리라는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세영이 할아버지는 요양사들이 자신보다 잘 해주지 못할 것 같아 집으로 모시기로 하고 집 청소를 하면서 몸살이 난 것처럼 열이 나고 춥고 온몸이 아프니 좋은 약으로 치료해 달라고 병원에 오셨다. 열을 측정하니 39.6도였다. 어디 다른 곳이 아파 약 드시는 것이 있냐고 물었다. 한 5, 6년 전에 소변검사에서 피가 나와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농사도 지어야 하고 노인 회관에 총무라서 일도 보아야 해서 가까운 비뇨기과에서 약을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래도 아랫배의 통증이 생겨 채혈을 해보니 전립선암이 의심된다는 결과를 들었다.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아 다시 D병원 비뇨기과를 찾았다. 전립선암이라 판명되고 전이될 가능성이 있어 항암치료에 들어갔다. 치료를 받는 중 머리가 빠지고 속이 울렁거리던 차에 할머니가 쓰러졌다. 할아버지는 치료를 포기하게 되었고 암은 서서히 전이되어 갔다.

오랜 세월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자연스럽게 가정주치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많은 환자들의 생업도 자연히 알게 되었다. 세영이 증조 할아버지는 안동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의 첫 번째로 위치하고 있다. 세영이 할아버지는 천부적인 예술재능이 있어서 모든 관공서의 차도사, 시내 상가의 간판들, 극장가에 홍보화면을 제작하는데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 미술사로 큰 성업을 이루었는데 내 생각으로는 평생을 페인트를 사용하다보니 그 속에 함유된 납 성분 때문에 전립선암이 온 것은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세영이 할아버지에게 D병원으로 가서 빨리 치료하라고 했지만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놓고 가겠다는 것이다. 설 연휴 마지막 날에 할머니를 모시러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접촉사고가 났다. 일어서지 못하여 D병원에 입원시켰다고 그댁의 자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즉시 D병원 802호에 가보니 하지가 부었고 CT결과는 암세포가 요추까지 전이되어 복수가 차 있었다. 온몸에 통증이 심하여 마약성 패치를 붙였다는데 환각상태였다. 큰 자부가 “전 원장님 오셨어요.” 흔들어 깨우니 “목말라, 목말라 물”이라고만 외친다. 자신이 얼마 살지 못하는 것을 아는지, 큰 손자 세영이에게 요양원에 가거든 할머니가 듣지 못하니 흰 종이에다 큰 글씨로 할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에 가게 되어 미안하다고 써 보여 주라고 했단다. 세영이가 그렇게 했더니 할머니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것이다. 

비가 끊임없이 내리던 날 오후, 세영이가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요양원으로 함께 모셨다는 전화를 해 왔다. 점심시간에는 두 분이 휠체어를 타고 로비에서 마주 앉아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하시고 할머니는 소리 없이 웃기만 해서 보기에 답답합니다 라고 해서 가보았다. 

세영이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아직도 우리는 할 말이 많은데 저리 못하고 있으니 말문을 열어줄 명의를 찾아 달라고 하소연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향하여 “여보, 당신은 이제껏 정성으로 나를 섬겨왔고 나도 사랑을 듬뿍 쏟았잖아요. 지난 세월 좋은 일, 궂은일을 함께 하며 아이들을 키웠고 노년을 더욱 다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병마가 이렇게 찾아왔네요. 누구보다도 또박또박 말 잘하던 당신이 왜 이렇게 되었소. 당신도 할 말은 많을텐데 하지 못하니 답답하지요. 천국에 내가 먼저 가면 당신을 기다리겠소. 당신이 먼저 가더라도 날 꼭 기다려 주시오. 그곳에서 육신의 아픔을 모두 벗어던지고 맘껏 못다 한 이야기를 합시다. 내 말을 듣고 있는 것이오?”

세영이 할머니는 식물인간으로 연명치료가 언제까지 갈까? 할아버지는 암세포가 뼛속으로 침범하니 그 고통이 또 얼마나 심할까. 고통을 참아가며 외치는 할아버지의 애절함을 듣고 있는 건지 할머니는 그저 오늘도 빙그레 웃고만 있었다. 우린 아직 할 말은 많은데 할 말은 많은데를 거듭 외치고 있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비록 육신은 고통 중에 있지만 마지막까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부부의 순애보를 보는 듯했다. 할아버지의 소망대로 부디 천국에서 다시 만나 그동안 못다 한 말들을 맘껏 나누시기를 바라면서 요양원 문을 나섰다.

그 후 10개월이 지나 지팡이를 짚고 교회에 출석하니 이것은 기적이며 나와 함께 교회 은빛 찬양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뇌경색으로 말을 못하고 미소를 짓는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에게 호소하니 나도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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