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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령' 이와 '미란다'<42>
'호령' 이와 '미란다'<42>
  • 의사신문
  • 승인 2010.01.2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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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건강도 나빠지시고 허리 통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셔서 남동생네 세 식구와 합치기로 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동생부부와 외동딸 그리고 고양이까지 네 식구가 들어온 것이다. 평소 아파트 안에서 개나 고양이 기르는 것을 싫어하셨던 어머니도 몸이 불편해지시니 고양이와 같이 사는 것을 허락하셨다.

베란다 한쪽을 막아서 3층짜리 고양이 집을 들여 놓고 조카딸 방으로만 드나들 수 있게 하고 거실 쪽으로는 못 가게 방문을 닫아 둔다는 조건이다. 조카딸 이름은 `호정'이고 아직 출생한지 1년이 안 된 흰색의 페르시안 고양이 이름은 `호령'이다. 어릴 때 마당에 개를 키운 적은 있었어도 집안에서 애완동물을 키워보지 않아 낯설었지만 `호령'이는 조카딸 `호정'이처럼 아주 조용하고 예쁜 고양이 같다. 제 집인 3층 꼭대기에 올라가서 여유 있게 식구들을 내려다보는 것이 객식구가 아니라 마치 주인처럼 오만하고 우아하기까지 하다.

1986년이니 벌써 20년이 지났나 보다. 영국 런던에서 자동차로 2시간쯤 걸리는 항구 도시인 브리스톨에서 1년을 살았다. 장학금을 받는 유학생 신분이었고 병원과 가까운 곳에 있는 주택의 4층 다락방을 빌렸다. 200년이 넘은 주택으로 은퇴한 주인 내외 `죤과 마가렛', 10살도 넘은 늙고 검은 고양이 `미란다'와 한 집에 살게 된 것이었다.

그 당시 영국 사람들은 물가가 싸고 태양이 찬란한 스페인이나 포르투칼로 휴가를 많이 갔다. 다음 해 여름인가 주인 부부도 집을 나한테 맡기고 스페인으로 휴가를 떠났다. 물론 고양이 `미란다'도 맡기고 간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 이곳에서 칠흑처럼 검은 고양이를 보았을 때 약간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서 가능하면 고양이와 눈을 잘 마주치지 않았고 고양이 역시 나한테는 무심한 듯 했었다. `미란다'에게 캔에 든 먹이를 주고 매일 배설물을 치우는 것이 임무였다. 고양이는 지정된 장소에만 배설을 하므로 영리하고 깨끗한 동물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1층 정원으로 연결 된 키친 옆이 `미란다' 숙소였고 정원을 통해 돌아다녀도 퇴근하여 집에 오면 항상 집에 들어와 있었다.

며칠간 나는 임무를 잘 수행했고 그날은 주말이라 2층 거실에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란다'가 내가 앉은 소파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가려고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저녁 시간에 `마가렛' 이 TV를 보면서 빗으로 `미란다'의 털을 빗겨주었던 것이 생각났다. 테이블 옆에 있는 빗을 집어 드니 `미란다'가 내 옆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고양이 목을 만져주면서 검은 털을 가지런히 빗으로 빗겨주었다. 손끝에 닿는 고양이의 부드러운 목덜미와 털의 감촉이 좋았다. 고양이도 카르릉 소리를 내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삐걱거리는 층계 외에는 적막이 감도는 이 오래된 집에 `미란다'와 단둘이라는 생각을 하니 고양이라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하루는 저녁에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정원에서 이름을 부르며 찾아 헤매기도 했다. 이렇게 `미란다'와 나는 4주를 보냈다.

그 후 주인 내외가 돌아왔고 고양이와 나는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이 한참을 지냈다. 어느 날 인가 주인 내외의 초대로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는데 `미란다'가 그곳에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라도 하려 했지만 `미란다'는 나를 본 척도 안하고 돌아서 가는 것이었다.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우리 둘 다 다정했던 과거는 가슴에만 묻기로 했다.

귀국한 후 3년 정도 지나서 `마가렛'은 `미란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편지로 알려왔다. 고양이로서는 천수를 다한 것이었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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