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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니에'와 함께 하는 추억의 단상
`마로니에'와 함께 하는 추억의 단상
  • 의사신문
  • 승인 2016.12.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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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53〉

필자가 의사신문에 이 칼럼을 시작한지 어느덧 2년이 넘었다. 〈마로니에 단상〉이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 종로구 대학로에 있던 서울대학교 교사가 1975년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하고, 옛 자리가 현재의 `마로니에 공원'이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에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마로니에 나무가 몇 그루 있어 옛 서울대를 연상시키는 일종의 닉네임이 되었다.

미라보 다리와 마로니에 나무, 1973년 봄, 대학신문

여기서 단상斷想이란 짧고 단편적인 생각이라는 뜻이나 많은 사람이 교단의 단상壇上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앙상한 가지만 있는 마로니에 옆 공원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 보고 추억을 회상하면서 몇 가지 단상을 가져본다.

서울대학교가 옮기기 전에 이곳 종로구 동숭동, 연건동과 이화동에 여러 단과대학이 모여있었다. 이 지역을 좁지 않은 폭의 개천이 청계천으로 흐르면서 동쪽 낙산 방향에 본부, 문리과대학, 법과대학이 있었고 서쪽인 창경궁 방향으로 의과대학, 약학대학, 음악대학, 의대부속병원이 자리잡고 있었다. 남쪽 이화동 사거리에 미술대학, 사범대부속 초등학교를 세웠다. 왕복 각각 1차선인 좁은 도로는 개천 서쪽에 있어, 반대편 단과대학은 다리로 개천을 건너 연결되어 있었다. 청춘인 학생들은 본부가 같이 있는 문리대로 들어가는 다리를 낭만적으로 `파리 센 강의 미라보 다리'라고 불렀다.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인 가로수는 땅이 좋아서 다른 곳 보다 키가 월등히 높았다. 당시 대학로는 가게가 거의 없는 한적한 주택가로 도로, 개울, 다리, 가로수가 제법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그림). 

본래 조선시대에 이 부근은 민가만 드문드문 있던 지역이었다. 한양 중심가에서 동쪽 궁궐인 창덕궁, 창경궁을 지나 동쪽 성벽에 가까운 외곽으로 동숭동에는 효종 동생 인평대군의 저택이 있었고 연건동에는 이석형 공의 생가가 있었다. 성종 이후 연건동은 왕과 왕족이 정원을 즐기고 승마를 하던 장소로 변경되었다. 한창때는 150마리 정도의 말을 길렀다고 한다. 

이석형 공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세종 시절에 이십 대 젊은 나이로 일년에 본 세 번의 과거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를 하였다. 대사헌까지 벼슬을 하고, 집도 부유하고 부족할 것이 없는 그는 연꽃을 좋아해 집안에 큰 연못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때 친구 김수온이 찾아와 “자네는 부족할 것이 없으나, 그렇다고 넘치게 살면 안되다.”는 충고를 하였다고 한다. 이에 공은 연못에 물이 가득 차지 않도록 도랑을 만들고 일부러 초가집으로 작은 정자를 지어 계일정(戒溢亭)이라고 작명하였다.

연안 이씨 집안은 넘치는 것을 피한다는 `계일정신'을 가훈으로 삼아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는 이야기다. 이 못에 연꽃을 가득 심어 동네이름을 연화방으로 불렀다가 행정단위가 동으로 바뀌자 옆에 있는 마을 건덕방과 함께 합쳐져 연건동(蓮建洞)이란 지명이 생겼다. 

구한말이 되자 이렇게 왕실 땅과 비교적 여유가 있던 공터를 학교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우선 고종황제가 앞장서 왕립병원 격인 대한의원을 내탕금으로 연건동에 건축하고 부설로 의학교인 교육부(경성의학전문학교의 전신)를 설치하였다. 동숭동에는 공업견습소도 세웠고 나중에 경성공업전문학교와 서울공대로 발전한다. 이화동에는 한일합방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의대의 전신)가 들어선다. 지금 방송통신대학에서 쓰고 있는 공업전문학교의 서양식 목조건물은 천재시인 이상이 건축과 학생으로 공부했던 곳이다. 

일제의 한일합방 후 이들 교육기관은 전문학교 수준으로 개편되어 고등교육을 맡아왔다. 삼일 만세운동 이후 1922년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선생 등이 조선인의 실력양상을 위하여 정식 대학교를 만들자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시작하였다. 문화정치로 정책을 바꾼 일제는 이에 대응하여 1926년 동숭동, 연건동 일대에 서둘러 경성제국대학교를 개교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민립대학은 못 세우고 제국대학이 설립되던 날, 이상재 선생이 축하식에 참석하려고 하자 대문 앞에서 제자들이 막았다. 선생은 껄껄 웃으면서 “지금 일본사람들이 대학은 세웠으나 여기서 배운 조선인들이 결국은 우리나라를 찾고 바로 세우는 중요한 인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해방과 함께 미국 군정에 의해서 서울에 있던 국공립 고등교육기관들이 합쳐져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서울대학교는 짧은 기간 내에 현대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상재 선생님의 예견대로 일제 때 경성제국대학에서 공부했던 한국인들이 신생 대한민국 설립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한 서울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 되어, 해방 후 지금까지 서울대학교와 졸업생이 우리나라 근대화와 세계화의 주축이 되어 왔다.

1960년대와 70년대 소위 개발독재를 하던 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도심지에 있는 반정부 학생운동의 온상인 서울대학교가 눈에 걸렸다고 한다. 마침내 관악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던 골프장을 남쪽으로 옮기고 1975년 그 외진 장소로 서울대학교를 이전하였다. 단지 병원과 연계된 의과대학, 치과대학, 간호대학은 그 자리에 남았다. 마로니에 공원으로 본부 앞 광장 일부만 남기고, 넓은 학교 부지를 주거단지로 분양하였다. 처음에는 주택가였으나, 연극, 뮤지컬, 영화관 같은 공연장이 하나 둘 생기고 젊은이들이 모여들면서 식당, 상점으로 번잡한 대학로가 되었고 센 강이라고 불리던 하천은 시멘트로 복개하여 그 위에 차도를 확장하였다. 

이곳에 있는 마로니에는 1929년에 일본인 이노우에 교수가 남 프랑스에서 묘목 세 그루를 가져와 심은 것이다. 당시에는 가는 회초리 같았으나 지금은 아름드리 나무로 크게 자라 은행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공원을 꾸미고 있다. 손바닥 모양의 잎을 가진 우아한 자태의 마로니에와 샛노란 은행나무 앞에 있는 4.19 탑, 우람한 느티나무로 둘러싸인 도서관, 센 강과 나란히 하고 있던 교수 연구실 같은 옛 캠퍼스 풍경이 아스라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필자는 1971년 이곳에 신입생으로 와서 지금까지 46년을 마로니에 공원 옆에서 지내고 있다. 예과 2년을 미라보 다리를 건너 다니며 문리과대학에서 공부했고, 의과대학생, 대학병원 전공의와 의대 교수로 인생의 대부분을 연건동에서 살고 있다. 의예과 과정 동안 문리대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고 인문학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접하고, 의과대학에서는 인간생명을 다루는 학문의 엄격함과 치열함을 배웠다. 한편으로는 군사독재와 민주화 과정의 혼란과 신념을 동참하면서 성장하였다. 물론 경제개발과 선진사회를 향한 우리의 집념과 성과도 같이 나누어 왔다.

정년을 앞둔 지금 김수온 공이 말한 대로 넘치게 살지는 않았으나 이상재 선생 같은 대붕의 뜻으로 대학생활을 해왔는지는 자신이 없다. 그러나 오늘도 묵묵히 서 있는 마로니에와 함께 이곳에서 현시대 우리민족과 대학의 굴곡과 영광을 같이 해올 수 있었던 나는 분명 행운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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