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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심란 (不欺心蘭) 그리고 선생님<16>
불기심란 (不欺心蘭) 그리고 선생님<16>
  • 의사신문
  • 승인 2010.01.13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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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난을 접한 것은 사실 화선지 위에서였습니다. 진짜 살아 있는 난을 본 적도 없이 대학에 입학한 그 해 봄에 난을 치고 표구를 해서 봄 전시회에 내걸었습니다. 꼭 그래야 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새해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설렘 속에서 꿈결처럼 다가왔습니다. 그 때까지 내게 상아탑이라는 대학은 저쪽 산 너머 어딘가에 있는 무지개가 뻗어 올라온 그 곳처럼 막연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실로 다가온 것입니다. 그렇게 27살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스무 살에 평생직장이라는 믿음으로 시작했던 철도공무원 생활을 약간의 두려움 가운데 포기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갔습니다. 처음 등교하던 날 교문을 지나 강의실까지 걸으며 오랜만에 행복하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 지하철 승강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중학교 시절의 담임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그 해 겨울 나는 열차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 밤 중에 출발하는 화물열차 승무를 위해 덕석처럼 두툼한 나일론 패딩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깃에 석탄 먼지가 거뭇거뭇했고 날씨조차 엄동이라 사뭇 꾀죄죄한 모습으로 인사를 드렸던 듯합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선생님의 첫 말씀은 `고생 많다. 대학 가야지.'였습니다.

측은한 마음과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하신 그 한마디가 대못처럼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비로소 무지개가 뿌리 내린 그곳을 찾아가 볼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선생님의 말씀 한 마디 덕분이었습니다.

학기 시작과 함께 서도회에 들어가 붓을 잡았습니다. 기본적인 운필을 마치고 춘계 전시회 소식이 전해오자 난 작품을 전시하겠다고 신청을 하고 화본을 받았습니다. 두 달이 넘도록 긋고 또 그었습니다. 머리는 온통 한 폭의 난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전시회를 마치면 선생님을 찾아뵙고 감사의 뜻으로 난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운필조차 서툰 처지에 화선지 위의 난이 제대로 짜여질리 없습니다. 그냥 흉내만 열심히 낼 뿐이었지만 붓으로 화선지를 가를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행복했습니다. 내 삶이 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신 분께 내 마음을 모두 담은 선물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봄이 지나갈 무렵 자랑스럽게 선생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 그림은 간직하고 계신지는 모릅니다. 한동안 연락을 잊고 지냈는데 이젠 학교도 퇴직하신지 오래되었고 전화번호마저 바뀌었습니다.

지난 연말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뵙고 함께 TV를 보는데 추사 선생님의 난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불기심란 (不欺心蘭)이라 부르는 이 그림에 10억 원이라는 감정가격이 매겨졌습니다.

`난초를 그릴 때는 먼저 자신의 미음을 속이지 않는데서 출발한다. 잎이나 술 하나를 그릴 때도 마음속으로 자성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을 때 비로소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작품이란 한 번 내 놓으면 모든 사람의 눈과 손이 주시하고 지적하는 것이니 어찌 두렵다고 하지 않겠는가? 난초를 그리는 것이야 어찌 보면 작은 재주이지만 반드시 진실로 생각하고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 기본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득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선생님께 난을 드릴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살았을까요? 올해는 불기심 (不欺心)을 마음에 담고 살겠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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