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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 그리고 아주 오래된 것<41>
버릴 것, 그리고 아주 오래된 것<41>
  • 의사신문
  • 승인 2010.01.1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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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을 맞으며 방과 책상, 옷장까지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왜 이렇게 모아두고 살았는지 버리고 정리하는데 1주일이 넘게 걸린다. 1차 처분 대상으로 3년 이상 입지 않은 옷들, 가방과 신발들이었고 책자는 물론 다이어리와 수첩들, 신문 스크랩에서부터 잡다한 서류들이나 USB에 밀린 CD들도 폐기 대상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버리면서 살았는데도 버릴 것이 엄청나다. 꾸역꾸역 밀려서 옷걸이에 걸려있던 옷들이 1/3쯤 빠져 나가니 이제 좀 여유있고 편안하게 자리를 잡는다. 아직은 애착이 가는 것들도 많았지만 더 오래되기 전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했다.

옷장 정리는 그래도 수시로 했지만 서재의 서랍 안에는 오래 된 새것들로 가득하다. 굴러다니던 사진들도 앨범에 정리하면서 버릴까 말까 망설이며 고른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이후에는 사진들을 컴퓨터에 저장했지만 여기저기서 받아온 것 들이다. 컴퓨터에서는 삭제키만 누르면 되는데 사진은 폐기하기도 쉽지 않다. 아날로그는 추억 정리도 느리고 길다.

어머니가 입원하신 틈을 타서 방을 옮겨드리기로 했는데 어머니 옷장 안은 더 심각하다. 포장도 뜯지않은 오래 된 수건과 비누상자, 우산까지 쌓여있다. 주방에는 백화점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그릇과 주방기구들이 가득하고 냉동실 안을 보니 이곳도 굉장하다. 작년 여름에 먹다 남은 옥수수 반 토막까지 냉동실에 널려져 있다. 어머니는 나보다 더 버리지 못하신 것이 틀림없다. 앞으로 몇 달간은 냉동식품이 다 없어질 때까지 시장에 안가기로 했다.

아주 오래되고 사용하지 않지만 버릴 수 없는 것들도 있고 10년 이상 매년 입는 옷들도 있다. 아주 오래된 것들 중 하나가 25년 전 쯤 선물 받은 일제 Pilot 만년필이다. 금촉의 고급스러운 것으로 검은색 바탕에 일본식 소나무가 그려진 것이다. 최근에는 만년필보다 편한 볼펜을 사용하는데 이번에 서랍을 정리하면서 찾아냈다. 굳어진 잉크를 씻어내고 보관되었던 잉크 심을 새로 넣으니 청색의 가늘고 예쁜 글씨가 써진다.

20여 년 전에 겁도 없이 구입한 하얀 밍크코트가 있다. 스타일도 구형이고 너무 화려한 것 같아서 자주 입지 않지만 그래도 매년 겨울마다 한 번씩은 입는다. 그때는 무엇을 입어도 반짝이는 나이였고 돈도 없었을 텐데 왜 그렇게 값 비싼 밍크코트를 사 입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직도 보관하고 있으니 애착을 느끼는 것이 확실하다. 애착은 유혹이고 미련이다.

옷장 깊숙이 있는 것들을 끄집어 내다보니 대학 졸업 즈음 쓰던 가죽 핸드백이 손에 잡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고 여러 번 정리하고 이사를 했는데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커다란 백에 이것저것 다 넣어가지고 다니니 이런 작은 핸드백은 앞으로도 쓸 것 같지는 않다. 퇴출 항목에 넣을까 하다 다시 옷장 안에 집어넣었다.

아직 건드리지 않은 곳은 거실의 장식장이다. 이곳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모은 것들, 선물 받은 것들이 장식장 네 개에 빼곡하다. 거기다 어머니가 최근에 배우면서 만드신 지점토 공예품 수십 점이 가득하다.

예전에는 버릴 것을 정리했는데 이번에는 보관할 것들을 정리했다. 버리려고 생각하면 아깝지만 꼭 보관해야할까 생각하면 좀 더 쉽게 버리게 된다. 버린 만큼 더 버려도 될 것 같은데 좀 더 두기로 한 것이 많다. 언젠가는 내손으로 버려야 할 텐데 아직은 그냥 쳐다보면서 또 한해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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