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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룡 교수님께 드린 편지
김정룡 교수님께 드린 편지
  • 의사신문
  • 승인 2016.10.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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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49〉

지난 10월 11일 서울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김정룡 교수님께서 타계하셨다. 선생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간 박사'였고 B형간염 백신을 개발한 뛰어난 연구자였다. 의료계에서는 상당한 카리스마를 갖춘 리더이면서 전무후무한 애주가로 이름 나 있다. 

우선 선생님은 탁월한 의학자이며 명의 중 명의로 소위 `스타 의사'였다. 우리나라 고질병인 간염, 간경화, 간암에 대해 1960년대 말 하버드대학 시절부터 평생 연구하였다.

B형 바이러스를 찾아내고 꾸준한 임상연구로 B형 간염의 진단법과 치료법을 확립하였다. 곧이어 1980년대에는 C형 바이러스의 존재도 규명하고 일관성 있는 임상 연구를 수행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우리 병원은 선생님을 찾아 전국에서 몰려 온 각종 간질환 환자로 북적거렸다.

매일 하는 병실회진의 풍경은 군대 지휘관의 사열식과 흡사하였다. 선생님이 나타나면 떠들썩한 병실은 갑자기 조용해진다. 환자들은 모두 복부를 노출하고 나란히 침대에 누워있고 선생님은 절도 있게 그 사이를 다니면서 한 사람씩 진찰을 한다. 엄숙하게 손으로 배를 한두 번 눌러 간을 촉진하고 전공의에게 검사소견을 물어 본다. 선생님은 환자 옆을 떠나면서 병의 상황을 한두 마디로 알려준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시간이 지나가고 질문 한마디 못한 환자들은 존경 어린 눈으로 병실을 나서는 선생님의 뒤 모습만 바라본다. 

신기한 것은 병실에 입원한 그 많은 환자를 선생님이 주치의에 앞서서 찾아가는 것이다. 간 환자의 얼굴, 신체에서 나오는 모든 정보를 직감적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외국 학회에 참석차 출국이나 귀국하는 날에도 짬을 내어 병실을 찾았으니, 선생님 회진이 철학자 칸트의 산책보다 더 철저하게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선생님은 간염 바이러스 연구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훌륭한 학자였다.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귀국할 때 시설이 열악한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연구할 수 있도록 모든 기기와 소모품을 가지고 왔단다.

겉 보기와는 달리 아주 꼼꼼하고 세밀한 선생님은 헌신적인 노력 끝에 세계 최초로 B형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였다. 당시 국산 백신은 가격이 저렴하면서 효능이 우수해 국가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여기서 받은 특허 자금으로 1984년 한국간연구재단을 설립하고 간연구소를 건축해 서울대학교에 기부하였다. 개인적 이익보다 국가적 사회적 차원에서 거금을 사용한 것이다. 물론 공로를 인정받아 무궁화 대훈장을 비롯해 큰 상도 많이 받았다. 이 백신 개발은 서울 의대의 3대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어 지금도 의생명연구소 2층 로비에 개발과정이 전시되어있다.

선생님은 의료계에서는 애주가로도 명성이 자자하였다. 진료와 연구 후 하루의 피로를 제자들과 함께 술자리에서 해소하였다. 두주불사로 술을 즐기는 교수님이 원내에 적지 않았지만 주량과 호기 면에서 아무도 선생님을 따라오지 못했다. 다른 취미가 없는 선생님은 낮에는 병원과 실험실에서 밤에는 식당과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선생님은 제자, 동료, 친지들과 매일 저녁 개인별로 또는 단체로 만남을 즐겼다. 

문제는 선생님이 너무 술이 강한 것이었다. 한창일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정년퇴직 후에도 회식자리에서 폭탄주를 먹어야 모임을 끝냈다. 신참 교수로 임명될 때에는 수개월을 선생님의 술동무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항상 선생님 술자리는 제자들과 소통하고 친분을 쌓는 시간이 되었고 또 과음을 하는 자리도 되었다. 

선생님은 사람 간에 가까워지기 위하여 술자리를 같이 하고 이를 `살을 비빈다'고 표현했다. 평소에 말이 없는 선생님은 회식자리에서 재미나고 또 남자로서의 패기도 보여 수많은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의사 수필동호회 잡지에 술에 대한 선생님 이야기를 내가 쓴 적이 있다. 허락을 받으러 간 나에게 껄껄 웃으시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하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겉으로는 카리스마 가득한 선생님이지만 나는 다른 면을 알고 있다. 실상 선생님은 내성적이고 소탈하였다.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이 조용하고 만나면 인사도 잘 안 받았지만 사실은 수줍은 성격 때문이었다. 또 선생님은 전형적이고 고지식한 교수였다. 당신은 원칙대로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규율이나 예의범절을 어기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였다. 

김 교수님은 평생을 의학 속에 빠져서 사신 분이다. 학생 때부터 엄청난 노력을 하는 학구파이어서 강의노트를 빠짐없이 꼼꼼하게 작성하여 인기가 높았다.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고창순 선생님이 서울대병원 레지던트를 응시할 때 김 선생님의 강의노트를 빌려 공부했다고 한다. 교수가 되어서는 연구도 온 몸을 던져 열중하였다. 의생명연구원에 전시된 연구노트를 보면 그 자세하고 빈틈없는 기록에 놀라게 된다.

함경도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목포로 피난 왔던 선생님은 밑바닥에서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자연히 사람을 평가할 때 배경보다는 실력을 우선으로 하였다. 내과 과장과 주임교수 시절 원칙이 있는 병원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다음은 내가 한달 전에 선생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학회 참석 후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쓴 편지이다. 

“김정룡 선생님 
뉴욕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편지 드립니다. 제가 민경업 선생과 1988년 NIH에서 장기연수 중에 선생님께서 방문하신 적이 있지요. 송인성 선생님 하고요. 그때 선생님을 오랜만에 가까이 모시고, 워싱턴 우래옥에서 가족들에게 크게 한턱 사주신 저녁식사, 민 선생 집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던 일이 이제는 그리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1971년에 제가 의예과에 들어와서 선생님의 첫 지도학생이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미국 연수 후 막 귀국하여 바쁜 와중에서도 한일관에서 회식을 가졌지요. 선생님은 주로 환자 옆에 계시니 학생이 상의할 일이 있으면 병실에서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자부심을 갖고 내과를 사랑하는 교수님이셨습니다. 학내외의 많은 보직을 마다하시고 교수로서 모든 시간을 병실과 연구소에서 지내는 `내과 지킴이'이셨습니다. 

선생님처럼 제자들과 많은 시간을 보낸 스승님은 없었습니다. 그 수많은 회식과 그 많은 분량의 맥주를 항상 모두 선생님이 사 주셨습니다. 무뚝뚝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선생님이 내심으로는 다정하고 제자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애제자인 유병철 선생도 동의하더군요. 

선생님 명성으로 우리대학 병실에는 예전부터 간 환자가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전공의인 시절에는 간염으로 입원한 환자가 간경화가 되고 간암으로 악화되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지금은 선생님과 간 연구소의 집념 어린 노력으로 간질환은 대부분 정복되고 해결되는 기적을 옆에서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을 들으니 같이하던 회식 자리가 그립습니다. 어서 이겨내고 일어나셔서 이제는 저희들이 앞장서 다시 살을 비비는 기회를 주십시오.”

이 편지는 끝내 선생님이 받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의학계의 어른이 하나 둘 떠나가는 이 시기에 선생님의 귀천은 우리의 큰 손실이다. 평소 주량이 적당했으면 좀 더 우리 곁에 계시면서 가르침을 주실 텐데….

김정룡 교수님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며 이 글을 바칩니다. 삼가 우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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