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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한 여름 밤 단상 斷想
이름에 대한 여름 밤 단상 斷想
  • 의사신문
  • 승인 2016.09.06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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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46〉

올해 여름처럼 무더운 밤, 잠을 설칠 때에는 서가에 가서 젊은 시절 즐겨 보았던 책을 꺼낸다. 전에 애독했던 구절을 찾아 다시 읽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피서법이자 수면제이다.

“네가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기 원하면, 그들이 평소 어떠한 판단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라.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를 원하면, 후세에 너의 이름을 전할 사람들도, 지금처럼 불공정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죽은 후 명성에 연연해하는 자는, 그 이름을 기억할 사람 하나 하나가 또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명심하라. 너에 대한 기억 자체도 한동안 그들의 뇌리에 오르내리다 없어진다. 만나지도 못할 후세의 칭찬에 그렇게 마음을 두는 것은, 마치 너보다 앞서 이 세상에 났던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어리석은 일이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다. 필자가 고등학생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던 명문장이다. 우리의 이름을 전하고 기억할 후세사람들 또한 없어지기 때문에 명예가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교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명성에 연연해하고 있다. 특히 동양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체면과 타인의 평가에 아주 예민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우리의 속담처럼 동물과 차별점으로 이름 즉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기본적 욕망으로 식욕, 색욕, 수면욕, 재욕, 명예욕 다섯 가지를 열거한다. 이 중 물론 재욕과 명예욕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이지만 가장 인간적인 것이 명예욕이 아닌가 한다. 원시인들이 동굴에서 함께 살아 사회적 동물이 되면서 집착하게 되었겠다.

내 생각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명성에 급급한 것은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일정기간만 산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재는 인간뿐이다. 이러한 허무한 현실 파악에서 사람은 거꾸로 영원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 결과 불멸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진선미眞善美)으로 대표되는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고 개인적으로는 자기의 이름이 후세의 기억과 기록 속에 남기를 원하게 되었다. 동물과 신 사이의 스팩트럼에 있는 인간이 동물적 욕망에서 멀어지고 신에 가까워질수록 명예욕은 더 커지고 버리기 어렵게 된다.

석가모니는 인생살이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로 탐貪. 진瞋. 치癡를 거론하였다. 즉 마음 속에 도사린 탐욕, 증오와 어리석음 3독三毒이 원인이란다. 모든 것이 공허하다는 세상사의 이치(색色 즉 공空)를 깨달아 재욕, 명예욕 등 헛된 욕망과 타인에 대한 증오를 버리고 진리를 쫓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논리이다. 개인적 실존實存의 한계에서 비롯된 명예욕을 우리 세상일이 허무하다는 실존의 인식으로 해결하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앞서 인용한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교훈도 이 범주 안에 있다.

흔히들 명예욕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말한다. 남에게 인정받고 또 과시하기 위해서 노력하면 어느 정도 일에 성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일의 성취로 자아를 실현하고 존재 이유를 확신하는 삶과 과장된 명성에 연연하는 삶은 확실하게 다르다. 철학가 에리히 프롬이 정의한 `존재 양식(To Be)'와 `소유 양식(To Have)'의 차이다. 자아 실현으로 생긴 능력과 결과를 타인과 공유하는 `존재 양식'적 삶이, 명예 욕심이 우선하는 `소유 양식'적 삶 보다 바람직하다.

무더운 여름날씨에 너무 딱딱한 내용이어서 내가 겪은 이름에 관한 몇 가지 싱거운 이야기로 끝을 내겠다.

우리처럼 같은 성姓 씨와 비슷한 이름이 많은 나라에서는 적지 않게 혼돈이 생긴다. 의과대학 두 학년 밑에 나와 이름이 비슷한 경상도 출신 후배가 있다. 학창시절과 수련의(나는 내과, 그는 일반외과 전공) 시절 비슷한 이름 때문에 웃지 못할 경우가 가끔 있었다. 잘못 연결된 전화통화에서 성격이 급한 그쪽 친척들은 더듬대는 나에게 직설적으로 불만을 나타냈다. 한 번은 나는 뱃속을 수술하는 `외과'가 아닌 `내과'를 하는 다른 사람이라고 설명하니까 더 야단치며 이렇게 반문하는 것이었다. “배쏙을 수술하이까-내꽈 아인가?”

반면에 나는 체면 차리고 느리기로 유명한 충청도 출신이다. 나한테 오는 친척 전화는 이런 식이다. 내가 누구시냐고 처음에 물으면 “나-여.” 보통은 목소리로 알아보나 모르는 경우도 있다. 재차 누구시냐고 여쭈어 보면 이번에는 “나-라니까?. 여기 잿-뜰이여-.” 절대 본인 이름은 이야기 안하고 동네를 말한다. 이 정도면 정말 누구인지를 알아 들어야 한다. 계속 몰라서 상대방이 이름까지 전화 속에서 밝힐 지경이 되면 나는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이름 정보를 검색하고 있다. IT시대를 상징하는 창조물이 된 이 기기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개인을 강력한 슈퍼컴퓨터와 연결시켰다. 흔히들 어떤 사람을 만나거나 새로운 일과 마주치게 되면 이것으로 찾아보고 도움을 얻는다. 인터넷에는 사적인 정보에서부터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내용까지 모두 저장되고 분류되어 있다. 예를 들어 구글 scholar에는 나도 미처 모르는 내 학술 정보가 가득 실려있다.

초등학교 2학년인 외손자가 어디서 배웠는지 만나는 사람마다 이름을 묻고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내 이름으로는 제법 긴 검색분량을 보고, 외할아버지가 유명한 분이라고 의기양양하였다. 나는 장난 삼아 손자에게 외할머니는 더 유명하다고 이름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검색을 마친 외손자는 할아버지 보다도 훨씬 분량이 많다고 자랑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놀라워하였다. 가정주부인 내 집사람은 오씨 집안에 이름은 연꽃 `용蓉'자 외자로, 인터넷에 수많은 약품의 오용誤用사례가 실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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