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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산악회, 백두대간 산행을 다시 시작하면서
서울시의사산악회, 백두대간 산행을 다시 시작하면서
  • 의사신문
  • 승인 2016.07.1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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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항산 피재에서 7년 만에 백두대간 재출발

필자가 서울시의사산악회 내에서 백두대간 산행을 처음 접했던 것은 10년 전이다.

박병권 전 서울시의사산악회장 마포 박병권내과의원장

2006년 11월12일, 백화산 포성봉에서 있었던 전국 대표자 산행에서, 당시 대한의사산악회 회장이었던 지금의 서윤석 고문님의 `대한의사협회 100주년 기념 백두대간 100봉우리 동시등정'의 주창이 있었다.

의협 창립 100주년을 맞이하는 이듬해 2007년 5월13일을 기해, 백두대간 능선상의 상징적인 100곳을 정하여, 동일 시각에 동시에 오르는 대행사였다.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10구간으로 나누고, 각 지역의 의사 산악회마다 지역을 할당하여, 총 1500명 인원의 동시 등정이 가능하도록 차량동원과 물자공급 등의 계획을 수립하고, 등정 후 태극기와 의협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헬기로 항공 촬영하여, 100주년을 맞이한 의협의 위상과 의사 산악회원들의 기상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자는 원대한 포부였다. 하지만 예산 지원의 어려움에 봉착하여 아쉽게도 불발에 그쳤다.

두 번째로 언급된 것은, 이듬해인 2007년도 가을, 박홍구 서의산 회장 임기 막바지에 김진민 당시 등반대장의 차기회장 재임 시의 숙원사업으로 결정하면서였다. 그 무렵 온갖 산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쫓아 다니던 본인에게 백두대간 팀장을 맡아보지 않겠냐고 하셨을 때, 망설임 없이 그 자리에서 수용했었다.

함께 계시던 박홍구 현재 고문님의 “이 친구 안 시켜줬으면 큰일 날 뻔했네”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아마도 팀장이란 호칭이 몹시나 좋아 보였었나보다.

대략적인 계획은 매월 첫 주에 근거리 위주의 당일 산행을 하고, 셋째 주말에는 일박이일의 장거리산행을 하는 것으로 하고, 의사회 차원의 공식행사나 기상이변이 없는 한 줄기차게 진행해 나갔다.

2008년도부터 서의산 총무이사직을 겸하다 보니, 기존의 정기산행과 답사 산행, 간간이 있던 특별 산행까지 하려니, 어떤 때는 월 3∼4회의 공식산행이 있어, 훈련팀원 모두 빼곡한 산행 스케줄을 따르기 바빴고, 총무인 본인은 정신없이 뛰던 시절이었다.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부터 백두산천지까지의 한반도 전체의 등줄기이지만, 현재 남녘으로는 강원도 진부령에서 대개 마무리하고, 향로봉까지 가고 싶다면, 군부대의 허가를 받고 초병의 인솔하에 가능하다.

우리도 지리산에서 시동을 걸었다. 2007년 10월13∼14일의 지리산 천왕봉∼세석평전 구간이었다. 능선상의 도상거리는 2시간40분이지만, 중산리에서 천왕봉까지의 오르막길 3시간40분, 세석에서 백무동까지의 내리막길 3시간을 더하니, 도합 10시간이 넘게 걸렸었다.

이왕 힘들게 능선에 오른 김에, 세석을 지나 성삼재까지 내달리고 싶었지만, 다음날 진료가 있는 개원의 입장에서는 어려운 일이어서, 다시 한 번 시간을 내는 수 밖에 없었다. 욕심 같아서는 한 번에 끝낼 구간이어도, 우리의 여건상 두 세번으로 나누게 되니, 늘어나는 산행차수에 대한 부담은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 산행부터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산행지를 고르다 보니, 접근이 쉽고 매력적인, 한 마디로 손님 끌기 좋은 곳부터 다닌 듯하다.

아랫녘 남부지방이나 강원도 심심산골에서는 일박이일이 필수였고, 토요일 오후 5시경에 출발하다보니, 현지 도착 후에 늦은 저녁식사, 다음날 새벽식사 그리고 점심 도시락까지 세끼를 숙소 주인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많았다.

백두대간 2차 산행(2007년 11월10∼11일 대관령∼진고개)은 준법산행의 계기가 되었다. 구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매봉에서 노인봉까지 출입통제 된다고 지도상으로 명시되어 있지만, 별다른 제지 없이 잘 다녀온 산행기들이 대부분이었기에, 안일하게 생각했었다. 뿔뿔이 흩어져 게릴라식 산행을 한다면,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의 통제를 피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들처럼 순한 양떼는 감시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적발된 일인당 50만원의 벌금도 적지 않지만 서의산의 명예 또한 중요했다. 실제로 속리산, 월악산 ,설악산 일대의 많은 구간에서 희귀 동식물보호, 자연휴식년제, 미정비 위험구간, 산불방지기간 등의 이유로 통제되고 있어, 우선 이들 구간은 뒤로 미루고 향후의 통제해제 여부를 봐가면서 전체산행을 마무리하는 것이 어떨까한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백두대간산행이 2009년 11월15일 덕유산 남쪽의 영취산∼육십령 구간의 22차 산행이후로 명맥이 끊겼다. 2009년 11월28∼29일, 일박이일의 복성이재∼영취산 구간을 준비하였으나, 참여인원이 부족하여 한 두번 연기하다보니, 피일차일 어느덧 7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다 꺼져가던 백두대간 산행의 열기에 다시 숨을 불어 넣은 것은, 정작 2년여의 백두대간 산행에는 거의 참여한 적이 없었던 서윤석 고문이셨다. 기왕에 시작한 행사이니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겠냐는 고문님의 의견을, 흔쾌히 수락한 현 집행부에 감사한 마음이다. 십년이면 강산도 인물도 바뀌는데, 새 식구들과 함께 다시금 시작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었다.

새롭게 이어지는 제23차 산행지는 삼척시 도계의 덕항산을 중심으로 하는 피재∼댓재 구간으로, 강원도에서도 오지에 속한다. 도상거리 26.1km,예상소요시간 12시간이다. 거리는 청계광교 종주와 엇비슷한데, 오르내림이 더 많으니 넉넉히 시간을 안배했나보다. 실제로 고갯수가 20개는 족히 넘겠는데, 산행 초반에는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 고개만 넘기면 끝이겠구나” 싶을 때마다, 서 너개씩은 더 넘게 만드는 게 백두대간임을 한 두번 겪은 게 아니었기에.

2016년 6월11일 토요일 오후 6시 서울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출발하자는, 노민관 등반대장의 제안에 따라 모인 자리는, 자연스럽게 백두대간의 재출발을 기념하는 전야제가 되었다.

전명숙, 고근아, 김윤정, 노민관, 공준택, 이재일, 연재성, 박병권, 양종욱, 박석진, 박석준, 최승일, 황홍석, 조해석, 유승훈(방 배정 순), 서의산의 내로라하는 건각들이다. 이중 어림잡아 열 명은 백두대간에는 첫 출전이다.

버스로 세 시간 이상을 달려, 태백시내의 `썬모텔'에서 새벽 4시까지 편히 자고, 인근의 `춘하추동' 해장국집에서 든든히 아침식사를 한다. 다시 버스로 출발지점인 피재에 도착하니 주변이 훤해졌다.

벌써 출발한 팀의 버스 한대가 쉬고 있고, 삼수정이라는 정자위에서 젊은 커플이 야영 중에 한가로이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 삼수령탑 주위로 모여 출발 전 기념사진을 찍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이 사진이 오늘의 처음이자 마지막 단체사진이 되었다.

삼수령은 피재의 또다른 이름으로 서쪽으로 한강을 이루어 황해로 가고, 남쪽으로는 낙동강에서 남해로, 동쪽으로는 오십천을 통하여 동해로 흐르는 세 줄기 물결의 발원지를 의미한다. 해발고도는 이미 935m, 첫 봉우리가 945봉이니 부드러운 출발이다. 시각은 오전 5시40분을 넘기고 있다.

이재일 고문님을 필두로 전명숙, 연재성, 양종욱 대원, 나까지 다섯의 올드보이가 선두로 나섰다. 요즘 가는 산마다 괴력을 발휘하는 양 감사에게 최선두에게 주어지는 무전기가 주어졌다.

신기한 물건을 이리저리 눌러보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난다. “저게 얼마나 족쇄가 될지 아직은 모르겠지! 그래 오늘은 양 감사 뒤만 졸졸 따라다니자!” 후미 조에는 조해석 회장이 등반대장과 함께 여느 때 처럼 수고해 주고 있어, 앞질러가는 입장에서 미안하기도 하고 한편 든든하다.

1차 목적지이자 합류장소인 건의령까지는 채 두 시간이 안 되어 도착했다. 예상보다 빠른 진행이다. 려말선초 시기에, 이 지역 삼척으로 유배 왔던 공양왕이 살해당하자, 고려의 충신들이 두건과 의복을 벗어던지고 벼슬을 멀리했던 장소라고 한다.

드디어 박석진, 김윤정 대원 그리고 유승훈 총무의 질주본능이 되살아났다. 잠시 숨을 고르기 무섭게, 새로운 선두조가 재편성되면서 후미와의 거리가 점차 벌어진다. 내친 발길에, 푯대봉 삼거리도 그대로 통과한다. 한의령을 지나 잡목지대 사이 서편으로 상사미 마을이 비스듬이 내려다보이는데, 동편으로는, 가파른 경사 저 멀리 삼척시 도계읍으로 추정되지만, 확연이 분간 되지는 않는다.

이십여 년 전에 동해시에서 근무할 때, 도계 탄광촌에서 오는 환자들이 참 많았었는데, 이렇게 오지인 줄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잘 해 드렸을 것 같다. 잡초 덩쿨 사이의 좁은 등로 곳곳에 산딸기, 꿀풀들이 널려 있고 간간이 초롱꽃도 눈에 띤다. 곳곳에 지자체에서 만든 위치 표지판이 잘 설치되어 산행에 도움이 되었다. 다만 근간에 산림청에서 새로이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표지판들은, 거리표시가 둘쭉날쭉 하여 오히려 혼선을 주었다.

덕항산을 앞두고 맞이한 구부시령, 참 특색 있는 지명이다. 이 근방의 대기리라는 마을에서 주막을 꾸리며 살던 어느 박복한 여인이, 함께한 서방마다 급사를 하는 바람에 무려 아홉 명의 남편을 맞이했다는 설이 기원이라 한다. 마지막엔 백년해로 잘 했는지도 궁금한데, 그 삶의 흔적은 찾을 길 없이 아담한 돌무더기만 덩그렇게 놓여있다.

서쪽의 하사미 마을로 통하는 탈출로가 있는 새목이를 지나 덕항산(1072.5m)으로 오른다. 지도상의 우측, 동해 쪽의 등고선이 더욱 촘촘해진다. 동해안과 나란히 달리는 산맥의 서쪽은 완만하고 동쪽은 경사가 급한, `경동지괴' 지형이 이 일대에서 더욱 뚜렷하다. `낭떠러지' 주의 표지가 걸린 경계선이 등로 우측을 따라 줄줄이 엮여있다. 슬쩍 내려다보니 언뜻 80도 각도의 급경사가 아찔한데, 저 멀리 환선굴을 향한 도로와 주차장이 눈에 들어온다.

환선굴, 거대한 석회암지대인 덕항산 일대를 모체로, 무려 5억3천만년 전에 생성됐다는 동양최대의 석회동굴이다. 덕항산 정상을 조금 지나면, 환선굴(골말)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나타나, 지쳐가는 나그네들을 유혹하고 있다.

시간은 어느덧 10시 반을 넘기고 있어 가까운 쉼터를 골라 이른 점심을 먹는다. 곧이어 이 구간의 최고봉인 지각산(환선봉 1081m)으로의 오르막이라서, 과식은 부담스럽고, 대신 적당한 곳에서 자주 먹는 게 좋을 듯하다.

자암재에서, 환선굴을 경유하는 마지막 탈출구를 뒤로하고, 오늘의 심리적 분수령인 큰 재를 향해 계속 전진한다. 초입에서 많이 보였던 낙낙장송은 아니어도, 좌우로 펼쳐진 숲이 시원스럽다. 좌측에 침엽수, 우측엔 활엽수들이 편을 가른 것도 흥미롭다. 나무 사이로 아직은 파종 전인 채소밭들이 펼쳐진다. 이제 큰 재가 멀지 않았다는 신호다. 호젓한 기분에 잠시 쉬는 사이 박석진, 최승일 대원이 속속 합류한다.

30년 전에 광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된 지역의 주민이 이곳 귀내미 마을에 정착하여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가 조성되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밭에 돌맹이들이 가득하여 경작여건이 열악해 보인다. 또한 경작지를 넓혀나가면서 등산로와의 구분이 어려워지고, 대신 임도가 구불구불 이어져있다. 뙤약볕에서 일하는 주민들 사이를 지나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본래의 산길을 찾아 걷는 것도 좋겠다싶어, 빤히 보이는 임도 보다는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하도 인적이 뜸하다보니 잡초가 무성하여, 초입에서는 확연했던 길이 갈수록 희미해진다. 게다가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지니 더 이상의 진행이 망설여진다. 유 총무와 박석진 대원이 각기 한 방향씩 맡아 길을 확인하러 나섰다. 잠시 후 박 원장 쪽에서 저 앞에서 임도와 연결된다고 소리친다. 나중엔 어찌되든 일단 그곳에서 길을 되짚어 보기로 한다. 그런데 막상 내려와서 보니, 정작 이곳이 그렇게 찾아 헤메던 큰 재였다. 줄곧 임도로만 진행했으면 쉬웠을 것을 애써 돌아온 셈이다. 그나마 좁은 지역에서 맴돌았기에 체력소모가 덜하니 다행이다.

후미팀의 알바는 재앙이지만 선두의 알바는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같은 실수가 없도록 뒷 사람들에게 상황을 알린다. 그런데 후미에는 연락이 되었는데, 중간 그룹과의 연결이 시원치 않다. 깊은 산중이라 휴대폰이 안 터지고, 어쩌다보니 무전기 세대가 선두에만 몰려있다. 하는 수 없이 혼선의 시발점까지 되돌아가서 직접 중간 팀을 안내하기로 한다. 유 총무와 박 원장이 뒤돌아 달려간 사이, 예정치 않던 장기휴식도 취해본다. 이윽고 이재일 고문님, 연재성 전 회장, 전명숙·고근아 대원을 오랜만에 재회하고, 황장산을 향해 먼저 나선다.

난이도는 덜하지만, 네 번의 오르내림을 더 하고나서야 황장산을 맞이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조릿대의 물결이 능선 주변부까지 올라오고 있어, 곧 댓재가 임박했음을 예고한다. 큰 재로부터 거의 두 시간 후, 드디어 댓재로 내려섰다.

저녁식사를 예약해 놓은 댓재 휴게소부터 찾아본다. 허름한 옛 가옥에, 투박한 주인장, 단촐한 식단이지만 싱싱한 푸성귀와 좋은 육질의 삼겹살이다. 십여 년 전 서의산에서 두타/청옥 산행으로 하룻밤을 묵었을 때, 별이 총총한 가운데, 잔을 기울였을 때의 그 맛 그대로다.

두 시간 후에 후미조까지 하산하면서, 알바를 포함하여 10∼12시간의 산행을 마무리했다. 모두들 힘든 하루였다. “내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백두대간 일거야!”라는 너스레도 들린다.

부디 망각의 여신이 찾아들어 다음, 또 다음 백두대간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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