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촌의 길을 걷다<14>
초촌의 길을 걷다<14>
  • 의사신문
  • 승인 2009.12.09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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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길을 걷고 있습니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전에 가본 적이 있는 면사무소 근처의 식당을 찾아가는 중입니다. 그 땐 차를 타고 잠깐 만에 도착했었는데 오늘은 시간이 꽤 걸릴 듯합니다. 12월에 접어들었는데도 오후 2시의 햇살이 제법 따뜻해 다행입니다.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시골길이라 부르기엔 뭔가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 서 있는 여긴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고 저쪽 큰 교회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길에 올라서면 거기서부터는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정돈이 되어 있습니다. 가끔은 차들도 씽씽 달립니다. 그래도 흙먼지가 없습니다. 다만 길가의 논과 아직 남아 있는 배추밭, 내년에 수확할 마늘밭의 파란 새싹, 그리고 길옆에 냉이가 지천으로 깔려 있으니 시골길은 분명합니다. 오후 2시의 햇살을 머금은 바람이 제법 부드럽습니다. 그런데 도통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니 허전합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부여인 데 논산에 오히려 더 가까운 이곳 초촌면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럴 듯한 산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소나무 밭이 여기 저기 보일 뿐 다가가 보면 산은 아닙니다. 그저 둥글둥글할 뿐 어디 한 곳 모난 곳이 없습니다.

꽤 걸었다 싶어 돌아보니 어머니 계신 요양병원에 온통 햇살이 가득합니다. 어렵게 살던 시절 어른들이 이 인근에서 가장 좋은 곳에 학교 터를 잡은 듯합니다. 흙벽돌에 초가지붕을 얹고 살았지만 아이들에겐 더 좋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구운 벽돌에 유리창을 달고, 기와를 얹은 그런 깨끗한 학교를 지었습니다. 그곳에서 지금은 노인들이 아픈 몸을 추스르며 지내고 있습니다.

문득 상념에서 깨 보니 길가 마른 덤불 속에 누런 호박이 서너 덩어리 보입니다. 조금 있으면 한 밤 추위에 얼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지난 봄 호박씨를 놓았던 그 분은 저기 누렁 호박이 아직 있는 것을 알고 있을 지 궁금해집니다. 얼려서 버리기엔 좀 아깝다는 괜한 생각을 합니다.

튼튼한 청바지에 등산화를 신고 굳이 먼 길을 걸어 점심을 먹겠다고 나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지난 번 식당에 들렀을 때 거기서 키우고 있는 춘란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 근처 소나무밭 어딘가에 난이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 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보이는 소나무 숲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춘란은 주로 남쪽 지방 소나무 숲에서 자랍니다. 소나무 잎에는 일반 나무와 풀의 성장을 억제하는 성분이 있어 한 여름에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습니다. 키 작은 난이 그나마 햇빛을 차지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는 곳입니다. 한 여름의 강한 햇빛은 적당히 자란 풀들이 가려주고 가을이 깊어 풀들이 한해살이를 마치고 스러지면 솔잎 사이로 들어오는 적당한 햇빛을 받아들입니다.

난은 겨울 햇빛을 즐깁니다. 잎이 상할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내년에 튼튼한 새 촉을 올리고 꽃을 키워낼 만큼의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나무에 기생하는 균의 도움을 받아 포자를 발아시켜 번식을 합니다.

그러나 이 근처의 솔밭엔 난이 자라지 않는 듯합니다. 몇 곳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아무 곳에도 춘란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나무들이 아직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아직 이 지역의 환경이 난이 자라기에 적합하지 않아서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한 주일 만에 다시 찾은 식당에선 김장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배추 속에 버무려 넣을 양념 냄새가 식당 안까지 가득합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막 버무린 김치가 한 접시 올라왔습니다. 조금씩만 담아낸 반찬이 시골스럽습니다. 오늘 점심을 먹기 위해 솔밭을 들락거리며 한 시간 넘도록 걸었기 때문인지 이곳 음식이 전보다 더 입에 붙습니다. 돌아갈 때는 부지런히 걸어야 어머니 계신 요양병원 저녁 시간에 닿을 듯합니다.

〈건국대병원 홍보팀 오근식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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