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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와 핫 해치 GTI 이야기<2>
골프와 핫 해치 GTI 이야기<2>
  • 의사신문
  • 승인 2009.11.25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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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탄생…폭스바겐의 운명을 건 도박

1973년 3월 테스트 기술자인 알폰스 로웬베르그(Alfons Lowenberg)는 연구개발부의 몇몇 동료들에게 내부 메모를 전했다. 폭스바겐이 적당한 스포츠 모델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었다. 폭스바겐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소비자들을 위한 현대적인 앞바퀴 굴림 고성능차인 프로젝트 코드 EA 337(미래의 골프를 위한 내부 코드)이 개발 최종단계에 접어들었다. 결국은 골프라는 신형차의 스포츠버전을 만들자는 이야기로 개발 계획을 받아든 경영진은 난색을 보였다. 단지 샤시 전문가인 Herbert Horntrich와 개발 책임자 Hermann Hablitzel이 최소한 로웬베르그의 아이디어에 기본적인 관심을 보였다. 로웬베르그는 꾸준히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을 찾았다.

예를 들면 마케팅 부서의 호르스트-디터 슈비틀린스키(Horst-Dieter Schwittlinsky)와 당시 폭스바겐 홍보 책임자였고 이전에 수년간 포뮬러 V 협회의 매니저였을 뿐 아니라 여가시간에 자동차 경주에도 출전했던 안톤 콘라드(Anton Konrad) 등이 특히 아이디어를 반겼다. 그는 또한 스포츠 모델이 회사 내에서도 극도의 비밀을 유지한 채 개발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1974년 골프라는 이름으로 선보일 새 모델의 높은 개발비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거운 짐이었다. 골프 자체가 회사로서는 도박이었다.

콘라드는 `스포트골프' 작업 그룹의 비밀 개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만났다. 하블리첼은 이미 마음을 뚜렷하게 굳혔고, 로웬베르그와 호른틀리히가 일에 참여하는 것을 말없이 받아들였다. 돌처럼 단단한 섀시를 가진 시로코의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그들은 서스펜션을 대폭 낮추고 시로코의 1.5리터 85마력 기본 엔진을 2단계 카뷰레터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난로 파이프와 닮은 배기 파이프로 씌워 100마력을 얻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차를 `으르렁거리는 괴물'로 기억한다. 비밀 팀은 곧 이것이 그들이 원하는 차가 아니라는 데에 동의했다. 스포트골프는 스포티하게 느껴지지만 점잖기도 해야 했다. 그래서 얌전한 버전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결과물은 아주 과격하지는 않으면서도 여전히 매우 빨랐다. 모든 비밀조직원들은 이 모델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고 용기를 얻었다. 개발자들은 개발 책임자인 에른스트 피알라(Ernst Fiala) 교수에게 스포티 카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의 생각을 물었다. 피알라는 “너무 비싸지 않나, 당신들은 모두 미쳤어”라며 결정타를 날렸다고 한다.

어쨌든 하블리첼과 동료들은 단념하지 않았다. 시로코를 바탕으로 한 스포트골프 프로토타입은 공식적으로 위장된 섀시 프로토타입으로 언급됐고, 비공식적으로 개발이 계속됐다. 로웬베르그가 엔진을 튜닝하는 동안 호른틀리히는 든든한 타이어에 맞춰 섀시를 조절했다. 205/60 HR 13크기의 타이어는 당시로서는 포르쉐 911을 능가하는 것이었다. 전형적인 독일 스포츠카조차도 1974년에는 185/70 타이어를 끼우고 있었다고 한다.

이 프로젝트를 1975년 봄 폭스바겐 테스트 센터에서 경영진들에게 시연했을 때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피알라 교수도 시로코의 옷을 입은 스포트 골프를 받아들이고 승인을 했다. 5월 말, 공식적인 승인이 개발부서에 전해졌다. 골프의 스포티 버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시에 마케팅부서는 스포티한 골프를 위한 좋은 시장 기회를 보았다.

폭스바겐 역시 다가오는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관중을 끌어 모을 차를 필요로 했다. 프로젝트는 갑자기 모든 측면에서 활력을 얻었다. 최고의 스포츠 특성을 가진 야수에서 점잖고 편안한 버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팅을 한 여섯 대의 프로토타입이 만들어졌다. 책임 디자이너인 헤르베르트 샤퍼(Herbert Schafer)는 스포트골프를 허약한 라이벌들과 구별할 수 있는 모든 작은 세부 디자인을 책임졌다. 예를 들어 라디에이터 그릴 둘레의 빨간 띠, 뒷 유리의 넓은 무광 검정 프레임, 검은 루프 라이너, 골프공 모양의 기어 노브와 체크 무늬의 시트 커버 등이 있었다.

새로운 테스트 매니저인 헤르베르트 슈스터(Herbert Schuster)는 즉시 섀시 개발에 최우선권을 주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그는 휠의 너비를 6.0인치에서 5.5인치로 줄이고 타이어 크기를 175/70 HR 13으로 줄였다. 그는 또한 앞 뒤 차축에 스태빌라이저를 더하고 편안함과 스포티함을 완벽하게 조합한 스프링과 댐퍼 구성을 개발했다. 아우디와의 협력으로 최신식으로 만든 1.6리터 연료분사 엔진은 110마력의 출력을 냈다.

이전의 비밀 팀은 그들의 작업을 스케줄에 맞춰 끝냈다. 1975년 9월11일 제46회 프랑크푸르트 모터쇼가 일반인들에게 문을 열었을 때, 폭스바겐 스탠드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골프 GTI 스터디(studie)의 데뷔를 반겼다.

`지금까지의 폭스바겐 중 가장 빠른 차'라는 문구는 광고를 돋보이게 했고 과장이 아니었다. GTI는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9초만에 가속해 크고 비싼 차들을 추월해 나갔다. 조심스럽게 발표된 `1만3000마르크 이하'라는 값은 여전히 가장 비슷한 독일 라이벌들보다 5000마르크 이상 저렴했다. 결과적으로 박람회의 방문자들은 경영진이 5000대의 특별한 차를 만들지 않을 수 없도록 감동시켰다.

1976년 중반 드디어 런칭했을 때 GTI는 1만3850마르크였다. 딜러들은 첫해 예정된 판매의 10배를 팔았다. 골프 GTI를 추월하는 것은 빠른 차종들에게 일종의 스릴이었다고도 전한다. 조금 비싸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구입 가능한 범위의 실용적인 수퍼카가 탄생한 순간이기도 했다.

강남에서 자주 보이는 골프 GTI는 이런 식으로 태어나 6세대가 되었다. 특별한 차이자 기념비적인 차였던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으로 쓸 수 있는 차이기도 했다. 비슷한 세그멘트에서 푸조의 205 GTI가 나오기 전 까지는 경쟁자가 없었다.

하지만 요즘은 경쟁자들이 너무 많아졌다. 차들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좋아졌기 때문에 경쟁자가 없던 호시절은 지났으며 다른 차들의 좋은 스포츠버전 역시 너무나 많다. 하지만 스포티한 차들을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많기 때문에 이런 틈새시장은 계속 진화한다.

안윤호〈송파 대광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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