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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신랑과 살인 용의자
의사 신랑과 살인 용의자
  • 의사신문
  • 승인 2016.05.16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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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38〉 

● 결혼을 가장 많이 하는 5월을 맞이하여 써보았습니다. 진정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결혼이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벌써 3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비슷한 일이 간혹 벌어진다. 사회면 톱기사로 어떤 나쁜 의사에 대한 소식이 실렸다. 우리 병원 인턴 선생이 중매 결혼을 했는데 지참금이 적다고 부인을 폭행했단다. 임신 초기였던 부인은 유산이 되었다. 신부는 의사와 결혼하기 위하여 열쇠 3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호화 혼수를 마련했다고 한다.

젊은 교수들은 기사를 보고 분개하기에 앞서 창피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열쇠 3개란 자가용, 아파트, 병원 열쇠를 의미한다고 하니 혼인이 성스러운 인륜지대사가 아니라 속셈 빠른 일종의 상거래로 전락한 셈이다. 의사가 무슨 대단한 직업이라고 이렇게라도 결혼하려는 여자들이 있을까? 저잣거리의 농지거리일 뿐 주위를 살펴봐도 이렇게 결혼하는 친구는 없다고 자부했는데…

의사의 품위를 손상시킨 그 전공의는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들 흥분하여 징계위원회를 열기로 얘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부원장인 고창순 선생님 결재를 받으러 간 행정 직원이 얼굴이 붉어져 돌아왔다. 허락을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 고 선생님과 회식을 하면서 그 인턴과 잘 아는 사이냐고 여쭈어 보았다. 선생님은 금방 내 의중을 눈치채고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그 의사가 누군지도 모르네. 그렇지만 당사자 사이의 자세한 내용을 모른 채 언론의 일방적 보도만 보고 마녀사냥 식으로 한 젊은이의 장래를 꺾어선 안 된다고 생각하네.” 말씀을 듣고 그 깊은 생각에 감탄하였다. 우리는 유력 일간지가 보도한 사건이라는 이유로 직접 진상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편견을 가졌던 것이다. 평소 열쇠 3개 이야기에 심기가 불쾌했던 참에 사건이 터지니 바로 감정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인생 경험이 풍부한 고 선생님은 이미 사건 발생과 해결의 중심점을 잡고 있었다.

폭행사건의 진상인즉 신부에게 오랫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고, 결혼 후에도 그 남자 때문에 부부싸움을 자주한 것이 전부였다. 장모가 주장한 폭행과 임신과 유산은 모두 확인되지 않았다. 언론계 인사와 친분이 있는 장모가 과장된 내용을 신문사에 제공했고 언론은 선정적인 보도를 한 것이었다. 친정 어머니가 의사 사위를 얻을 욕심으로 딸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강행한 결혼의 말로였다. 이 병아리 의사는 그 후 훌륭한 외과의사가 되어 지금 중견교수로 맹활약하고 있다. 물론 첫 번째 아내와는 헤어지고 재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고창순 선생님의 심려가 좋은 결과를 남긴 것이다.

1957년도 미국 영화 `12명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영화는 뉴욕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 명작 법정 드라마다. 스페인계로 상습범인 18세 소년이 친아버지를 잔인하게 살인한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충격으로 미국 사회가 떠들썩했다. 12명의 배심원 중 현장을 목격했다는 여인의 증언에 따라 1명을 제외한 11명이 사형이 명백한 유죄 평결 의견을 낸다. 무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주인공 배심원은 객관적 증거를 하나하나 검토하면서 아들이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하게 된다. 사실과 증언을 두고 격렬한 토론을 하면서 다른 배심원들도 주위 분위기와 편견, 분노 등 주관적 감정에 휩싸여 소년을 부당하게 의심했던 것을 깨닫고 결국 무죄 평결을 내리게 된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이 영화에 감명을 받아 법대에 가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마음이 따뜻한 판사가 되어 피의자를 존중하고 이해하며 진실을 찾아 공정한 판결을 내리려고 노력했다. 가정재판소 소장으로 있을 때는 가족 간의 관계 회복을 돕는 방향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지금은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법률 상담을 하면서 재소자를 교육시키는 일도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 친구 말이 재소자들에게 시험 삼아 인문학 강좌를 해 보았더니 굉장한 호응이 있고 교화 효과도 컸다고 한다. 그 후에는 더욱 수감자의 인격을 존중하게 되었단다.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믿음과 존중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이라는 `성선설(性善說)'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소중하게 대접받고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 거기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마련이다.

“부처님 눈에는 모두가 부처로 보인다”고 하지 않던가! 사랑은 존중에서 시작한다.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커지도록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다는 편견을 갖지 말고, 개개인의 존재가 소중함을 인식하자. 또한 진정한 사랑은 진리와 정의라는 두 주춧돌 위에서만 높이 쌓을 수 있다. 인턴 장모의 경우처럼 진실하지 않은 사랑은 무너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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