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20:52 (토)
해남에서 기억해야 할 시인 고정희 
해남에서 기억해야 할 시인 고정희 
  • 의사신문
  • 승인 2016.05.16 1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난이 있는 정담 〈154〉 

해남의 여행지로는 땅끝과 두륜산 대흥사 그리고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는 녹우단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대부분의 여행은 이 세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한 번의 방문으로 이 세 곳을 다 보고 알기에는 어지간한 일정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주마간산하듯 바삐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유품이 정리되어 있는 생가에 앉으면 그저 편안하다.

그날 바삐 다니다 보니 해질녘이 되어서야 송정리의 고정희 시인 생가를 찾았습니다. 논이 넓게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산이랄 수는 없는 동산 아래 집이 보입니다.

논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운전하기에 꽤나 불편할 정도로 좁습니다. 행여 맞은편에서 경운기라도 들어오고 있다면 낭패라 생각하며 조심조심 길을 갔습니다.

농촌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길가 집에 가까이 가자 그곳이 목적지임을 말해줍니다. 초행길을 이리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고정희 시인이 살던 그 시절이 그리 오래 전도 아닌데 그의 세상에서는 아직 없었던 문명의 이기입니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 들어서는데 아주머니 한 분이 마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씨가 무척 고마웠습니다. 혹시 모르니 차는 마당으로 들여놓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고는 시인의 유품이 정리되어 있는 별채의 형광등 스위치를 올리고 슬며시 방으로 들어갑니다.

방에 앉아 가만히 둘러보았습니다. “고행 묵상 청빈”이 새겨진 나무 현판이 눈에 들어옵니다. 시인의 좌우명이겠지요. 책이 많아서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나머지는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었습니다. 시인이 생전에 사용했던 이런저런 물건들과 사진을 찬찬히 살폈습니다.

이제 방안 풍경이 조금 눈에 익기 시작했습니다. 눈길이 자꾸 책장에 놓여 있는 노랑나비를 향합니다. 노란 종이를 오려 나비처럼 만들어 붙여두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그 노랑나비 모양의 종이에 사람들이 글을 남겨두었습니다. 시인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같이 애틋합니다. 시인도 세상과 사람들을, 특히, 그 시절의 여성을 이처럼 애틋하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책상에 작은 인쇄물이 놓여 있습니다. `노래하는 뜰'이라는 제목의 월간지입니다. 손바닥 크기에 표지까지 여덟 페이지입니다. 고정희기념사업회에서 발행합니다. 사람들이 추천해 주는 시를 손글씨로 쓰고 펜그림을 추가해 보기에 부담이 없습니다.

집어든 인쇄물을 펼쳐 시를 읽었습니다.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않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첫 연을 읽는데 `마흔세살에 지리산을 찾았다가 실족하면서 불어난 물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스칩니다.

작은 월간 시집을 몇 장 더 집어 들고 방을 나오며 책을 한 권 샀습니다. `너의 침묵에 메마른 나의 입술'. 책값은 작은 도자기 단지에 넣어 두고 집을 나섰습니다. 문을 닫고 불을 끄고 안채를 향해 인사를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하늘에 별이 가득했습니다.

Tag
#N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