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수필 - 하루하루가 모두
기념수필 - 하루하루가 모두
  • 의사신문
  • 승인 2016.04.1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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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헌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홍지헌 강서·연세이비인후과의원

지난 56년간 의료계 모든 순간 함께한 나의 벗 아내는 기념이 될만한 날들은 모조리 챙긴다. 30여 년 전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2월 22일 오후 2시였다고 그날을 필두로, 결혼기념일은 물론이고 약혼 기념일, 생일, 시댁 식구들의 모든 생신, 생일을 달력에 표시해 놓는다. 만약 우리가 일상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뒤돌아보며 감격하고 행복해하며 오래오래 기념하고 싶어 할 것인가.

첫 걸음을 내딛은 날도, 첫 마디 말을 시작으로 말문을 튼 날도,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배운 날도, 글자를 깨우친 날도, 삐뚤삐뚤 글씨를 쓸 수 있게 된 날도, 학교에 들어간 날도, 처음으로 친구와 인사한 날도, 선생님께 처음으로 칭찬받은 날도, 만족할 만큼 좋은 성적을 낸 날도, 상을 받은 날도, 처음 시를 지은 날도, 중요한 시험에 합격한 날도, 중압감을 느끼며 처음 수술을 배운 날도, 처음으로 환자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은 날도, 실의에 빠져있다 스스로 힘을 낸 날도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못지 않게 오래 기억하며 자축할 가치가 있는 날이 아닐까.

우리 아이들이 첫 걸음을 내딛은 날도, 첫 마디 말을 하게 된 날도, 눈을 맞추며 처음으로 웃어준 날도, 혼자 배변을 성공시킨 날도, 심하게 아프다가 회복된 날도, 수술 받고 퇴원했던 날도, 모두 기념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유한하므로 하루하루가 모두 축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매일 매일을 축하하기는 물리적으로 힘든 일이므로 기념할 명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날 만이라도 챙기려는 것은 당연해 보이며, 그럴 가치가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우리는 빵 위에 촛불을 꽂았네
 우리는 글자 위에 촛불을 켰네
 글자는 금세 환해지고
 빵은 금세 환해지고
 우리는 글자가 새겨진 빵 주위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치고
 고깔모자를 쓴 아이는 후, 입김을 불었네
 우리는 축 생일을 자르고 축 개업을 자르고
 축 발간을 잘라 한 조각씩 나눠먹었네
 우리는 빵 위에 새겨진 글자들을 나눠먹었네
 축 생일이 잘리고 축 개업이 잘리고
 축 발간이 잘리고 빵 위에 새긴 글자들은 잘리었네
 빵 위에 글자를 새기는 건 나빠, 좋아?
 대답이 필요없는
 모임이 끝나고
 우리는 낱말처럼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네

위 시는 유홍준 시인의 `빵 위에 쓴 글씨' 라는 시 전문이다. 살면서 축하할 만 한 행사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물어보나 마나한 일이고, 대답이 필요없는 일이다. 함께 모여 밥을 먹고, 케익 위에 촛불을 켜고, 후 불어 촛불을 끄고,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부르는 정도로는 충분히 축하했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의미있는 하루하루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다만 감동과 의미의 그 순간을 정확한 날에 못박아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연륜이 쌓인다는 사실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게 된다. 90년에 전문의가 되어 잠시 종합병원에서 봉직하다가 강서구에 개원한 지가 30년이 되어간다.

몇 년 전에는 오랫동안 우리 지역을 떠나지 않고 회원으로의 의무를 다해주어 감사하다는 의미로 구의사회 총회에서 축하금을 받아 당혹스러웠고, 몇 년 지나면 회갑을 맞았다고 또 축하를 받을 것이 예상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나이들어감에 따라 내가 속해있는 모든 모임들도 연륜이 쌓여 기념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의사 수필 동인회인 박달회도 40주년 행사를 한 것이 벌써 몇 년 전의 일이 되었고, 모교에서 목요일마다 지역 개원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해주는 지역의사 집담회도 30주년 행사가 지나갔다. 무심히 지나간 이런 행사들의 의미도 곰곰이 되새기게 된다.

큰 잘못 없이 지나온 세월에 대한 감사, 큰 실수를 했던 것을 잊지 말자는 다짐, 커다란 영광을 오래 음미하며 함께 물들어 보는 감격, 앞으로의 온갖 풍파에도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함께 하자는 각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여 있는 것이 행사의 의미가 아닐까. 그래서 대답이 필요없이 연륜이 쌓이는 것은 그저 축하할 일이고 함께 모여 밥을 먹을만한 일이라는 생각이다.

요즈음은 고령의 환자가 오면, 나도 저 나이되도록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경외심을 갖게 된다. 행색이 초라해 보이는 분들을 볼 때에도, 저분도 영광의 세월을 보냈을 것이고 오욕의 시간도 보냈을 것이고, 현재의 상태에 만족할 리 없지만 마음을 비우고 현실을 받아들이며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어떤 경우라도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사신문사 김동희 기자님이 의사신문이 벌써 창간 56주년이 되었다고 귀뜸해 주신다. 나도 50대 후반에 접어들었으니 동시대를 함께 지낸 친구같은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륜이 쌓였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아직은 더 성숙되어야 할 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의사신문 56주년을 내 일같이 자축하며, 큰 잘못없이 지나온 날들에 감사하며, 의료계와 함께한 영광과 좌절과 분노의 세월 모두가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하며, 모두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의사신문이 더욱 발전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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