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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산사(山寺)에서
겨울 산사(山寺)에서
  • 의사신문
  • 승인 2009.11.09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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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 이정균 원장
운길산(610m), 그 중턱(400m) 수종사(水鍾寺)뜨락 아래엔 두물머리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장쾌한 그림이 펼쳐지고 있다.

조선왕조의 대문호 서거정은 동방의 사찰 중 최고의 전망을 가진 절집이라고 하였다.

산자락엔 물안개, 양수리 강변 갈대밭, 청둥오리가 물그림자를 그리고, 갈색 갈대꽃은 늦가을 바람에 솜가루를 날린다. 남한강, 북한강 두 물줄기의 두물머리 한강은 서울쪽으로 꼬리를 감추고 팔당호에 드문드문 떠 있는 섬들은 한낮에도 안개에 갇혀 아득하다. 속눈썹같이 기다란 마을 앞섬 소내섬….

울창한 숲 속의 산사, 암석, 맑은 약수터, 단풍이 낙엽으로 바뀌는 산풍경속의 고요함은 서울 근교를 잊게 하는 곳이다. 핼쑥해진 산, 우수수 잎진 나무들의 야윈 숲 사이에서 소나무, 잣나무 푸른 동체가 한결 어엿한 빛을 발한다. 그래서 “추운 겨울이 된 연후에야 송백(松柏),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노래했으니, 겨울 소나무는 정절의 상징이다.

바람은 절로 불어오고 / 해 맑은 물소리는 종소리를 내며 향기로운 차 한 잔 우려 내는 곳 / 자네는 이 맛을 아시겠는가? / 기쁘고 기쁨이 / 이보다 더 할까보나. 물안개… 골안개… 추억안개 그리고 팔당호를 그리며 석양 노을 아름다운 운길산 수종사를 읊은 시다.

수종사의 창건연대는 부정확하다. 경내엔 해탈문도 일주문도 없다. 등산로가 끝나 경내로 들어가는 절 입구에는 미륵불이 서있다. 대웅보전 오른쪽에 불이문(不二門)이 있다. 불이문을 나서면 조선왕조 세조가 식수하였다는 500년 아름드리 은행나무 두 그루가 역사의 무게를 더하고 있다. 절 주위엔 황금색 은행잎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을 산사의 절경 속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수종사는 묵언(默言)중이라 방문객들도 덩달아 말을 아낀다.

약사전 앞 석간수 그 물맛이 일품인데. 시(詩) 선(禪) 차(茶)가 하나되는 다실 `삼정헌(三鼎軒)'은 차와 함께 동방제일의 전망 감상 포인트다.

그 옛날, 초의 선사, 다산정약용, 정조의 부마 홍현주, 추사 김정희의 발자취 따라 삼정헌의 통유리 시원한 창을 통해보는 산 아래 강풍경은 한 폭의 그림 동양화다. 겨울산사(山寺)는 꾸밈이 없어 더 좋다. 작은 절은 아름답고, 소박하며, 절 마당엔 묵직한 위엄이 느껴진다. 소박한 돌계단, 아름다운 계곡길, 세월의 무게를 간직한 돌부처의 풍화작용이야기를 들으며 바라만 보고 있어도 세상살이 갈등, 대립, 그리고 긴장이 풀린다.

산사(山寺)의 하루를 여는 도량석(道場釋)은 특이한 `모닝콜'이 아니다. 자비를 베풀고 법음을 전하는 깨달음의 도량을 열어 생명이 깃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함께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를 서원하는 성스러운 수행의식이다.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북, 법고 소리에 이어 목어, 운판, 범종 사물(四物)의 울림은 우리 인간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 일체 만물이 함께 깨어 불법을 따라 부처가 되자는 숭고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

청정한 독경소리는 세속번뇌를 사라지게 하고 스님은 부처가 된다고 하였다.

초겨울이다. 땀 흘려 찾아간 그 곳 산사(山寺)에 서서 승려의 발자취 쫓아 과거와 만나는 여정에 섰다.

산사로 향하는 길은 항상 즐겁다. 늦가을 낙엽이 우수수 쌓인 길을 따라 고요한 산사로 가벼운 여행을 떠나 전국의 산사들은 왁자지껄 단풍놀이를 끝내고, 침잠속 적막함에 둘러 쌓여있다. 조용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산사여행은 더 없이 좋다.

걷기 힘들 정도로 쌓인 낙엽이 와삭와삭 발밑에서 단풍잎의 수다를 들으며 초겨울 맑은 하늘에 울려 퍼지는 풍경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잔잔한 물처럼 편안해진다.

어김없이 찾아온 세월의 마디, 한해를 돌아보며 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할 시기다. 고즈넉한 산사, 고작1년이란 세월을 보내면서 소란을 떠는 인간들에게 천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지킨 산속의 고찰은 우리중생들에게 할 이야기가 많을 게다. 낙엽귀근(落葉歸根) 찬란한 한여름의 영광을 발밑에 내려놓은 겨울나무의 마른가지가 더욱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황량함을 덮어 줄 하얀 눈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고 치열한 경쟁 속, 삶의 여유와 멋 그리고 나를 잃고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머리를 어지럽히는 계절병이 도지는 연말이다.

겨울산사에서는 고요 속에 겨울산이 들려주는 오케스트라 3중주를 들려준다.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스산한 바람소리, 스님들의 처연한 독경소리 그리고 바람에 일렁이는 처마 밑 풍경소리는 간간이 장단이 맞는 엇박자 가락이다. 특별한 관심, 바람도 없이 절집에 애워싸여 있는 풍경, 자연, 역사의 냄새 속에 나를 맡겨 바라보며 묵묵히 산풍경속에 파묻혀 녹아보자. 울울창창숲은 오탁에 찌든 속인의 마음을 씻어줄 것이다.

이정균<성북 이정균내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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