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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 남은 하멜의 자취 
강진에 남은 하멜의 자취 
  • 의사신문
  • 승인 2016.03.2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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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51〉 

다산 정약용이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자취가 너무 커서 다산을 빼고는 강진을 이야기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진 읍내에 다산이 머물렀던 주막과 만덕산의 다산초당 그리고 백련사는 강진에 온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은 찾아가 걷습니다. 월악산 남쪽 야트막한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백운동별서정원을 찾아온 사람들도 종국엔 다산의 발자국을 발견합니다.

강진군 병영면에 있는 하멜기념관 인근 마을의 돌담길 일부. 350여 년 전 이곳에서 약 7년간 억류되어 생활했던 하멜 일행이 쌓았던 담장 양식이라 한다.

유배의 땅 강진에서 긴긴 세월 울분을 삭이며 고향 집을 그리워했던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바로 네덜란드 사람 하멜입니다. 사람들에겐 그저 `하멜표류기'를 쓴 사람이고 이 책을 통해 최초로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린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멜이 일행과 함께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군 병영면에 그를 기리는 하멜 기념관이 있습니다.

헨드릭 하멜은 동인도회사의 직원이었습니다. 1653년 8월 일본으로 향하던 중 배가 난파되면서 타고 있던 선원 64명 중 36명이 살아남아 제주도에 땅을 밟았습니다. 삼엄한 감시 가운데 제주도에서 10개월을 보내고 이들보다 27년 전에 조선에 표류했다가 귀화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와 함께 서울로 이송되었지만 서울 생활도 고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양에서 통역을 담당한 사역원에 수용되었다가 국왕의 친위대인 훈련도감에 배치되었지만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청나라 사신을 만나고 탈출을 시도한 것이 발각되어 1년 9개월만인 1656년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멜 일행을 강진에서 7년간 기약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강진의 동북쪽 분지에 자리 잡은 전라병영성의 잡초 뽑고, 이집 저집 담장 쌓고 개천 정비하며 겨우 먹을 것 얻어먹는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7년을 생활하는 동안 14명이 사망해 22명이 남았습니다. 병영 지역에 기근이 들어 이들을 먹여 살리기조차 어려워지자 이들 중 12명은 여수로, 5명을 순천으로 그리고 다른 5명은 남원으로 이송됩니다.

다시 3년이 지난 1666년 순천과 여수에 있던 8명이 일본으로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낮선 나라에서의 감금생활이 끝났습니다. 남아 있던 8명은 2년여가 지난 뒤 1668년 일본으로 송환되었으니 원하지 않았던 땅에 발을 들인지 15년 만입니다.

하멜은 고향에 돌아가 조선에 억류되었던 기간의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한 업무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하멜의 보고서는 출판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유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의 나라였고 동시에 아시아와의 무역에 필요한 생생한 정보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멜의 보고서는 1917년 재미교포 잡지인 `태평양'에 연재되었는데 이를 최남선이 발견하고 `청춘'이란 잡지에 게재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에도 알려 졌습니다. 지금까지 10여 종의 하멜 표류기가 우리나라에서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지금 강진군 병영면의 전라병영성은 복원공사가 진행 중입니다. 성 내에 일제 강점기에 세웠던 학교는 밖으로 이전하고 허물어졌던 성벽을 다시 쌓고 있습니다. 발굴 작업도 진행 중이고 성 주변에 무질서하게 지어진 건물들도 철거하고 있으니 한두 해 더 지나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근의 마을 안길로 들어서면 그 반대의 모습을 봅니다.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돌담은 허물어진 곳이 여기저기에 있고 담장안의 집은 더 사람이 떠난 지 오래되어 쓰러지고 있습니다. 하멜과 그 일행들이 쌓아 놓은 돌담길을 걸으며 순천의 낙안읍성 안에 보존되어 있는 초가집 마을이 머리를 스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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