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여름 지휘자 폴 자허의 초청으로 스위스 바젤을 방문하게 된 바르토크는 베른 근처 산장에 머무르는 동안 문득 떠오른 악상을 스케치한다. 그해 9월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그는 머릿속의 그 악상을 `현과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으로 완성한다.
`1936년'은 스페인에서는 내란이 일어나고,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헝가리는 불안한 정국이었다. 이 시기에 바르토크의 음악에도 짙은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관악기가 없는 교향곡인 이 곡은 작곡가의 격렬한 갈등, 인간의 존엄성과 불안한 시대의 절실한 감정 등이 어우러져 있으면서 3년 후 다가올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묻어있다.
강철음판을 가진 코르크 헤머와 피아노건반으로 구성된 악기인 첼레스타를 사용하는 이 곡에서 바르토크는 세밀한 부분과 거시적인 부분 모두에서 거울 형식을 시도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거울형식은 실로폰 독주에서 나타나는데 실로폰은 드럼소리를 출발점으로 하여 어느 쪽으로 보나 똑같은 진행을 하고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세르비아 민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불가리아 춤곡처럼 소리들의 오묘한 조화로 화음적인 수를 놓으면서 그만의 상상력이 풍부하고 화려한 음향으로 발전해 특유의 색채를 띠게 된다. 이 곡에서는 타악기적인 피아노 양식이 변모되어 좀 더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바르토크적인 양식의 변화는 그의 모든 작품을 통해 계속 이어져오는 민속음악의 정수와 서양 음악의 최고 형식을 통합한 다양성과 색채감이다. 바르토크는 음악적으로 개혁가는 아니다. 오히려 과거와 현재의 음악을 능숙하게 통합한 작곡가이다.
바르토크는 9세 때 작곡을 시작해 12세 때 자작곡으로 피아노 연주 무대를 가지게 되는데 그때 만난 선배 작곡가 도흐나니의 민족주의적 정열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 때 고국에서 헝가리 민족음악을 배워야 한다는 도흐나니의 충고로 비엔나 음악원을 포기하고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했다. 1905년 파리에 간 그는 드뷔시와 라벨의 음악에 감명을 받았으며 특히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영향 아래서 바그너, 리스트에 몰두해 있어 그만의 작곡은 거의 쓸 수가 없었다.
이 시기에 애국심과 독일 낭만주의 사이에서 일종의 괴리감을 느낀 바르토크는 자신의 음악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돌파구로 헝가리 민속음악을 찾게 됐다. 코다이와 함께 헝가리 민요 수집에 나섰고, 1911년에는 `신헝가리 음악협회'를 설립했으나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다음해 해체되었다. 당시 반대자들은 `흙 묻힌 발로 살롱을 더럽힌다'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시골의 농부들 틈에서 보냈던 그 시절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진실로 이 음악의 활력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음악대로 살아야 했다. 이것은 농부들과 직접적 접촉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가능하였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민속 음악은 후기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탈출구를 뜻하는 것이었다.
제1악장: Andante tranquillo 푸가형식으로 전개되는 형식으로 주제와 전개가 반복적으로 응답하면서 마치 불안한 건축물을 쌓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제2악장: Allegro 소나타형식으로 현악기군을 제1, 2군으로 나누면서 주제들을 실타래 풀듯이 전개해 나아가고 있다.
제3악장: Adagio 목금의 고음이 리듬을 타면서 비올라가 민요풍의 선율을 노래한다. 그 뒤를 이어 첼레스타와 바이올린이 점점 음을 부풀리면서 클라이맥스로 발돋움을 하게 된다.
제4악장: Allegro molto 론도형식 다섯 개의 서로 다른 리듬을 되풀이하면서 제1악장의 주제를 추가, 눈부신 색채의 변화를 그리면서 화려하게 곡을 마감하게 된다.
■들을만한 음반 : 프리츠 라이너(지휘), 시카고교향악단(RCA, 1958);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 베를린 필(EMI, 1960); 피에르 블레즈(지휘), 시카고교향악단(DG, 1994); 안탈 도라티(지휘), 디트로이트심포니(Decca, 1965); 레너드 번스타인(지휘), 뉴욕필(CBS 1961)
오재원〈한양대 구리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