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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 추수<31>
콩밭 추수<31>
  • 의사신문
  • 승인 2009.11.0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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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하고 있는 봉사단체에서 사회복지시설로 추수 봉사를 갔다. 단체 구성원들이 의사들도 있지만 일반인들이 많기 때문에 의료 봉사가 아닌 노동 봉사였다.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 지역인 화천군 광덕산 부근의 `평화의 집'이라는 곳이다.

10월 중순이라 서울 시내 나무들은 아직 초록빛이 더 많은데 산속은 벌써 단풍이 절정이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가을 깊숙이 들어온 듯 일행들은 제대로 된 가을 단풍 구경을 한번도 못했다면서 예상치 못한 행운에 황홀한 탄성들이다.

봉사금과 라면 등 생활 물품을 증정하고 성당 근처의 콩밭 추수를 하는 것이 우리 일정이다. 5명의 일꾼이 하루 종일 해야 하는 일이라고 했으며 우리 일행은 여자 4명을 포함한 15명이었다. 남자들은 낫으로 콩대를 자르거나 뽑고 여자들은 그것을 모아서 묶어서 한곳에 모으는 일이다. 작년에도 참석했던 회원들은 익숙하게 일을 시작한다. 여의사들 중 참석한 이옥주, 조필자 선생님도 열심히 콩대를 묶으셨다. 아빠를 따라온 초등학생 추수꾼 둘도 낮선 풍경이 신기한지 뛰어 다니며 한 몫 거들고 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콩 추수지만 마른 콩깍지가 터져서 콩 한 알이라도 버려질까 콩대를 살살 다루어야 한다. 그래도 떨어지는 콩들이 아깝다고 하니 그런 콩들은 거름도 되고 야생 동물들의 먹이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란다. 이렇게 콩대를 모아서 2주 정도 지난 후에 타작을 한다고 한다.

품안 가득히 콩대 묶음을 운반하면서 밭을 계속 왕복하다 보니 다리도 어깨도 뻐근한 것이 제대로 노동을 한 것 같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밥으로 아침을 때운 회원들에게 밭에 둘러 앉아 먹는 막걸리와 두부 김치가 꿀맛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높고 푸른 하늘 아래 병풍처럼 펼쳐진 산은 단풍이 절정이고 수확의 계절에 땀을 흘리면서 추수하는 농부의 행복을 잠깐 맛본다.

아마추어 추수꾼들이지만 15명이 열심히 하다 보니 3시간 좀 넘어 밭 전체의 추수가 끝났다. 콩대가 닿았던 피부가 따갑고 선선한 바람 속 가을 햇빛이라 우습게 봤더니 얼굴이 벌겋게 익은 것 같다. 마음은 콩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은 타오르는 단풍에 있었던 콩밭 추수꾼들은 쌓아 올린 콩대들을 둘러보면서 가슴이 뿌듯하다.

복지원 원장님이 정성스럽게 장만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금방 밭에서 캐온 고소한 날 배추쌈과 배만큼 시원하고 달디 단 무, 무청이 소담한 총각김치, 도착할 때부터 장독대에서 장 익는 냄새가 쏠쏠하다고 입맛을 다시던 된장국, 구수한 시래기나물의 식사 메뉴는 밥 한 공기가 모자랐다.

주변 백운계곡과 광덕산은 가을 산행을 즐기는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었으며 아직 힘이 남는 일행들은 늦었지만 산행을 준비하고 우리 여의사들은 서둘러 귀가하기로 했다. 새벽에 올 때는 괜찮았지만 예상대로 귀가 길은 4시간이나 걸려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료의 연속처럼 여겨졌던 의료봉사와 다르게 노동 봉사는 의사들에게는 비효율적인 봉사일지 몰라도 나름대로 일상을 탈출한 신선한 기회였으며 깊은 산속 단풍을 미리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다. 오늘 거둔 콩으로 두유와 두부를 만들고 된장을 담글 수 있다니 땅과 하늘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들이 신비롭기만 하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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