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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평생 아들들 걱정에 한 순간도 쉬지 못해 죄송”
“한평생 아들들 걱정에 한 순간도 쉬지 못해 죄송”
  • 의사신문
  • 승인 2009.11.0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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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을 여의고<하> 김인호<서울시의사회 감사ㆍ김인호소아청소년과의원장>

▲ 김인호 원장
병원과 약국 약을 복용했으나 효험이 없이 고열 복통 구토에 시달렸고,몸에는 발진이 돋으며 오줌은 붉고 눈과 얼굴은 노랗게 물들어 의식마저 희미해 지는 정도의 반혼수상태였다. 그 때 저녁 무렵이었다. 어머니께서 찬 우물에 머리를 감으시더니 쪽빗머리에 비녀를 꽂으신채 하얀 치마 저고리를 갈아 입으시고 나의 머리맡에 앉으셨다. 놋쟁반에 맑은 물을 담고,다른 쟁반에 생쌀 한줌을 담아 놓고 숟가락으로 쌀을 한 곳으로 뫼처럼 쌓으시며 주문을 하듯 애절한 음성으로 기구(祈求) 하시는 것이었다.

“조상님께 비나이다.천지신명께 비나이다.무자(戊子)년 인시(寅時)에 출생하여 조상님께 제(祭) 올리며 살아온 우리 셋째 인호가 더러운 잡귀에 혼을 뺏겨 인사불성이 되었기에 온갖 잡신을 쫓아내어 어서 어서 제 정신과 몸을 가누도록 도와 주소서…비나이다”

아련히 반복되는 애절한 목소리에 난 실눈으로 어머니를 쳐다 보았다. 어머니는 온 정신을 모아 쌀알로 뫼 쌓기에 집중하며 그 뫼의 정수리에 숟가락을 꽂으시는데 번번이 그 숟가락은 서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이었다. “물렀거라! 훠이! 잡귀들은 물렀거라!”하시며 다시 집중하여 빌며 숟가락을 세웠으나 또 엎어졌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무녀(巫女) 처럼 줄기차게 애원하며 반복하셨고, 그것은 정성(精誠)과 악귀(惡鬼)의 줄다리기 같이 팽팽하였다.

얼마가 지났을까, 어머니의 이마에 땀이 베이고 창백한 얼굴이 될쯤, 숟가락이 딱 멈추며 곱게 기립하자 어머니는 두손을 모으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쌀 한톨만 어느 쪽으로 흘러 내려도 넘어지던 그 숟가락은 밤이 으슥하도록 곧게 서 있었고, 나의 몸은 신기하게 가뿐해 지며 신열은 땀과 함께 식고 정신이 맑아졌다.

무녀(巫女)가 되어 선령(善靈)과 악령(惡靈)을 조율하며 신비한 능력을 다룰 수 있는 원시적 샤머니즘, 어머니의 그 힘은 어디에 내재되어 있었는지 한 동안 나를 당혹하게 하였다. 오랜 수련 과정을 통해서만 신병의 내림굿을 보인다는 강신무(降神巫)의 초능력을 내 병든 몸으로 간증하였던 어머니,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신(神)들린 강신무로 보지 않는다. 유추컨대 어머니의 정성과 희구가 나에게 새로운 면역성을 넣었을 거라고 믿고 있다. 그 때의 그 장면은 나의 인생에 구도자의 마음을 되새기게 하였고, 혼신의 힘을 소진시키며 아들의 쾌차를 기구하셨던 어머니의 그 집중력은 내 인생에서 어렵고 힘든 고비가 닥칠 때마다 최선을 다 했던 인내심의 바탕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영안실 빈소를 찾은 나의 친구들이 한결같이 회상하였다. “자네 모친은 끼니가 없어도 우리들이 가면 언제라도 무엇을 먹여 보냈지 않은가. 그 때 그 맛이 아직 혀 끝에 감돌고 있어…”

또 일가 친척들은 어머니의 젊은 날을 회고 하며 “얼마나 부지런 하고 입이 무거운지 셋째 며느리인데도 노망든 시어머니를 5년 동안 모시면서 너희 세형제들을 혼자 키웠지. 그 뿐이냐. 고조, 증조부모 조상 제사를 다 모셨는데도 불평 한 마디 없으셨지 뭔가.극락 천당 가실 거야”

그런데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엇갈린 인생의 운명을 한탄하시며 “내가 죽거든 아버지 옆에 눕혀 두지 말고, 화장하여 뿌려다오”라며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그 유언을 받드는데 우리 형제들은 큰 갈등을 일으켰다. 아버지는 충청도 영동에서 내가 두 살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유산 하나없이 가족들에게 가난을 지운 무능력을 비감하여 술을 과음하셨는데 주사가 심한 편이셨다. 주사가 심한 날은 아예 어머니는 이웃집이나 길거리에 배회하다가 아버지가 잠이 들면 밤이 깊어 귀가하시곤 했던 숱한 세월,결국 평화로운 한 때를 못보내시고 대책없이 돌아가신 그 아버지 묘역에 어머니는 때가 되면 정성스레 성묘하고 제사 올리고 하였기에 우리들은 돌아가시면 합장하리라 했었는데 어머니는 저승에서는 같이 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셨던 것이다.

생전에 어머니는 불교를 믿어 내온정사에 등을 달고 우리 가족 모두의 행운을 기원하시곤 하였는데, 어느 이른 봄날 막내 동생 내외와 조카까지 일가족 모두가 어이없게 사망해 버린 교통사고가 발생하였다.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어머니는 화장한 유해를 손수 봉분 매장하시더니 객사한 영혼들을 위로한다고 보상금 전액을 공양하고 3년 동안을 절에서 스님 사시듯 기도하셨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며 바람 한점 없이 맑고 투명한 날, 우리 가족은 부모님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충북 영동에서 수목장으로 치루기로 하였다.

북한산 북쪽 산자락의 노적사(露積寺)에서 위령제(慰靈祭)를 올리고 어머니의 혼백을 떠나 보내 드렸다. 49제를 주도하는 몇분의 스님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승무(僧舞), 흐느끼듯 애절한 춤사위는 이승에서의 고뇌와 아쉬움을 모두 거두어 한번에 떨쳐 버리는,슬프고 고독한 여자의 일생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나빌레어, 어머니가 겪고 가신 가냘픈 몸부림같기에 나는 사죄(謝罪)하는 마음으로 엎드려 수십번 절을 올렸다.

초가을 석양 아래 풀벌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 세상을 영원히 떠나신 어머니의 자취를 애써 더듬어 보지만, 유치한 나의 필력으로는 한 줌 흔적(痕跡)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세월이 가고 나 또한 어머니 곁으로 훌훌히 떠날 때 이 세상에 남긴 내 자취가 어머니의 흔적 한 줌 정도라도 될 수 있을까. 이제라도 생전에 베푸신 어머니의 은혜(恩惠)가 내 자식들까지 축복(祝福)되어 이어 지도록 `부끄러움 없는 삶이 되게 하리라' 마음속 깊이 새기며 다짐해 본다.

김인호<서울시의사회 감사ㆍ김인호소아청소년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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