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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백운동별서정원에 남은 다산과 초의의 자취
강진 백운동별서정원에 남은 다산과 초의의 자취
  • 의사신문
  • 승인 2016.02.29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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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50>

 

강진의 백운동별서정원은 아직 방문객을 맞을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알음알음 찾아가고 입소문을 내면서 조금씩 알려지고는 있지만 처음 가려는 이에겐 쉽지 않은 길입니다.

1812년 가을 다산이 명명한 백운동별서정원 12경 중 제1경인 옥판봉. 12월의 겨울비가 아직 그치지 않은 때 신선이 머문다는 정선대에서 바라보았다.

백운동별서정원은 무위사 근처의 안운마을 뒷산에 있습니다. 남해고속도로 강진 IC를 나와서 무위사를 향해 가다가 안운마을로 들어가 안운주차장에 차를 세우거나 무위사를 왼쪽에 두고 조금 더 가서 길가에 새로 만든 월출산다원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됩니다. 어느 쪽에서든 약 200여 미터의 숲길을 걸으면 백운동별서정원이 문득 보입니다.

초행길에 백운동별서정원의 주소를 검색해서 내비게이션만 바라보고 가다 보니 강진 차밭을 지나 별서정원 뒤쪽으로 난 비포장 산길을 생각 없이 들어섰습니다. 간밤에 겨울비가 내려 쉽지 않은 산길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가다보니 산 속에 홀연히 집이 나타났습니다. 겨울의 아침 햇살이 충분히 퍼지기 전에 인적 없는 산속의 집에 들어와 노닐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돌아 나왔습니다.

아무런 사전 조사가 없었던 터라 이 집을 본 첫 느낌은 깊은 산속 시냇가에 자리 잡은 양반집이었습니다. 담장은 허물어져 있고 그 안에선 공사가 진행 중이라 조금은 어수선했습니다. 추후에 새로 지어 원래의 모습과 달라진 안채를 헐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입니다. 기왕에 시작했으니 늦어지더라도 백운동별서정원이 처음의 모습을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백운동별서정원이 더욱 아름다운 이유는 여기에서 다산과 초의선사의 자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담로가 처음 이 백운동별서정원에 들어온 지 110년 쯤 후에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곁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이담로의 5세손 이덕휘와 그의 아들 이시헌이 있었습니다. 어린 이시헌이 다산초당에 제자로 들어감으로써 두 집안의 인연은 후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만덕산 백련사의 스님 혜장과 교류하던 중 젊은 초의를 만났습니다. 1812년 가을 20대의 초의와 50에 들어선 다산이 월출산에 올랐다가 정상까지는 가지 못하고 내려와 이곳 백운동별서정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백운첩을 남겼습니다.

2001년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백운첩에는 백운동별서정원과 만덕산의 다신초당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초의의 작품입니다. 그림과 함께 다산은 백운동별서정원의 12경을 찾아내어 그 모습을 시로 남겼습니다. 어느 시는 다산의 친필이고 어느 시는 아직 무르익지 않은 초의의 글씨이며 어느 시는 초당에서 다산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의 글씨입니다.

다산이 노래한 백운동별서정원의 12경을 찾아다니며 눈에 담습니다. 제1경은 신선이 머문다는 정선대에서 바라보는 월출산 옥판봉입니다. 겨울비가 내린 뒤라 안개에 슬쩍 가려져 있습니다. 다산이 왔을 때는 월출산의 단풍 색이 고울 때였을 것입니다. 겨울비가 내린 뒤 안개 속에 숨어 있다 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옥판봉의 모습도 일품입니다.

별서 안팎 곳곳에 다산이 이름붙인 12경이 그의 시와 함께 소개되어 있습니다. 몇 시간이고 서성이며 그의 시를 읽으며 멀리 또는 가까이 있는 나무와 풀과 바위를 바라봅니다. 마음의 한가함이 끝없습니다. 이른 봄 동백이 만개하면 또 오고 싶어 마음이 달뜰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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