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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과 동물 사이 
신(神)과 동물 사이 
  • 의사신문
  • 승인 2016.02.29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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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33〉

흔히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있는 존재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인간-동물-식물-무생물의 위계질서가 있다고 했다. `중간자(中間者)'라는 개념은 비단 학자들뿐 아니라 일반 대중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어 인간사의 다양한 측면에서 관찰되고 적용된다.

생물체의 발전을 설명하는 이론에 진화론과 창조론이 있다. 진화론은 모든 동물의 조상이 동일하고, 환경에 따라 변화하고 적응하면서 현재의 동물계가 만들어졌다는 주장이다. 창조론은 신이 다양한 동식물종을 한꺼번에 만들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 동물 중 인간이 가장 뛰어나 신과 비슷하다는 점만은 인정한다.

진화론에서는 유인원에서 높은 지능을 가지는 방향으로 극단적으로 진화한 것으로, 창조론에서는 신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든 것으로 설명한다. 이치를 생각하면 진화론이지만, 원숭이와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난 지능의 차이는 진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면도 있다. 사람과 가까운 종족인 원숭이와의 관계는 연구 대상이다. 모든 신체 장기의 구조와 기능이 거의 같다. 유전자 분석도 99%가 동일하다. 사람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증거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원숭이는 6세 정도에서 성인이 되고, 사람에서는 15세 이상 되어야 어른 몸으로 자란다. 사람에서 원숭이 성인에 해당하는 6세에 성호르몬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다. 과거 원숭이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이 아무런 근거 없이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나이로 7살이 되면, 남녀가 이성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동물을 뛰어넘게 된 이유는 지능 발달에 있다. 유인원과 비교해 두뇌 활동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비슷하여 미미한 차이만 있을 뿐이지만, 활성도는 크게 다르다. 유인원보다 사람이 우월해진 까닭은 의사소통과 책을 통해 지식을 모으고 분석하여 후세를 교육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유인원도 자식을 교육시키지만 사람과 같은 적극적인 교육이 아니라 수동적인 교육이 대부분이다. 높은 지능은 이성을 낳았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능력이다.

인간의 육체가 가진 속성은 동물과 다를 바 없지만 지능과 이성을 갖춘 정신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오직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본능을 넘어서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거나,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거나'를 스스로 결정한다. 이 중요한 능력을 이성, 양심, 도덕성, 자유의지, 선의지 등으로 다양하게 부른다. 하지만 신과 비교하면 항상 불완전하다. 이런 부족한 부분도 `인간적'이라고 한다. 언어에서도 인간은 신과 동물 사이에 있다.

나는 또 하나 인류의 장점이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라고 본다. 다른 동물은 태어나거나 어릴 때 바로 온전한 생명체가 된다. 즉, 구조와 기능이 대부분 결정되어 있다. 사람은 다른 동물에 비해 신체 조건이 비전문화되어 훨씬 미완성인 존재로 태어나 15∼20년 동안 성장한다. 갓 태어난 송아지는 이내 걸어 다니지만 사람의 아기는 무력하다.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철학자 셸러는 “인간은 환경을 변화시키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가는 개방성의 존재이다. 다시 말하면, 동물의 생生은 닫혀 있지만 인간의 삶은 항상 열려 있다. 인간은 가소성만 가지고 출생하여 사회 안에서 문화를 습득하면서 자신을 이룩해 가는 존재다”라고 정의했다. 신체나 두뇌의 기능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로소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다.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와 비교해 사람에게는 불완전성과 가소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인류 역사상 원칙적인 이념과 규율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려는 노력이 크게 두 번 있었다. 바로 기독교 사상과 공산주의다. 원죄, 구원, 영생을 기반으로 한 기독교 교리는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서양 중세시대에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사랑, 신앙과 영생으로 가득한 밝은 세상을 기대했지만 실제로는 면죄부로 상징되는 암흑시대가 되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인본주의가 위축되고 종교의 위선이 판치는 시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또 한 번의 시도는 공산주의였다. 마르크스가 1867년 대영제국도서관 책상 위에서 쓴 `자본론'은 당시 지식인의 바이블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능력껏 생산하고 개인 소유 없이 모든 사람이 필요한 만큼 사용하자는 공산주의는 거의 완벽한 이론처럼 보였다. 그러나 구성원이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이러한 사회를 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불완전한 인격은 남보다 더 일하고 더 적은 소득을 가지는 상황을 용납하지 못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태만과 태업이 횡행했고 정부는 노동을 강제하면서 새로운 공포정치가 등장했다. 소련과 동유럽의 모든 공산정권이 무너졌으니 역사적으로 KO패를 당한 셈이다.

불완전한 인간에게 융통성 없는 원칙을 적용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선 신과 짐승 사이의 중간자라는 위치를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과 감성에 크게 영향 받지만 이성으로 조절할 수 있는 불완전한 인격체다. 이성적, 윤리적인 기준을 이해하지만, 동물의 속성으로 이를 준수하지 못하고 때로는 과실을 범하기도 한다. 이러한 경우에 사회생물학적인 입장으로 이해하면서도 이성에 호소하는 적절한 대처가 필요하다. 가변성의 장점도 참조하자. 일본에서 수필가로 활약했던 김소운 선생의 작품 중에 `특급품'이라는 글이 있다. 일본 바둑판에 대한 이야기다.
 
“일등품 바둑판은 연하고 탄력이 있는 비자나무로 만든다. 두세 판국을 두면 바둑돌에 의해서 움푹움푹 들어가나 며칠이면 다시 평평해진다. 그러나 불의의 사고로 바둑판이 갈라지기도 한다. 균열된 바둑판은 헝겊으로 싸서 1∼3년 내버려 두면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동안에 바둑판은 제 힘으로 상처를 고쳐서 본래대로 붙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 힘으로 도로 붙는 것은 박자나 물리 유연성이 실제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같이 될 뻔했던 불구 병신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내면 되레 한 급(級)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過失)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 중략 -

그러나 과실로 해서 더 커 가고 깊어 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淨化)되는 굳세어지는 사랑이 있다. 생활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 제 상처를 제 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비자나무 바둑판'의 탄력―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 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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