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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과 낙태<30>
성폭행과 낙태<30>
  • 의사신문
  • 승인 2009.10.28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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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 의사로서 가장 언급하고 싶지 않고 피하고 싶은 것이 성폭행과 미성년자 임신에 관한 것이다. 파렴치한 범죄와 사회의 부조리에 직접 마주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개방된 성문화와 성충동을 유발하는 각종 음란 매체들은 성폭력의 증가와 미성년자 임신과 같은 사회비리를 유발하고 있다. 문란한 거리에 내몰려진 소녀들 대부분은 폭력에 의해 성경험을 하게 되고 피임에 대한 기초 상식도 모르는 상태에서 임신이라는 생소한 경험을 겪게 된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이들을 대해야 하는 것, 자신에게 잉태된 생명에 대한 죄의식보다는 수술비와 통증이 걱정되고 부모가 알까봐 두려워하는 이들의 철없음과 절박함 앞에 낙태가 불법이며 생명과 출산의 당위성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차라리 진료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결혼을 몇 달 앞둔 직장 여성이 생리불순과 불규칙한 출혈로 내원했다. 진찰 결과 임신 3개월이었고 임신될 당시 직장 회식에서 술에 취했고 상사에게 성폭행 당했다는 것이다. 본래 생리도 불규칙하고 약간의 출혈도 있어서 임신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환자를 대하면 산부인과 의사인 필자는 가슴에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왜 좀 더 빨리 뭔가 대책을 세우지 않았냐고 환자를 탓하는 마음까지 든다. 그러나 `성폭행을 당했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자신의 권리를 찾아야 하고, 우발적인 성 접촉에 따른 질병이나 임신의 가능성도 생각하여 미리 방지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하는 것은 의사로서의 생각이다.

직장 회식에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상사에게 당한 성폭행을 고지하고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문제, 결혼할 남자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리고 이해받을 수 있는지의 문제, 임신과 응급피임 교육에 대한 무지를 전제로 할 때 이런 모든 것들을 극복하면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그녀는 피해자일 뿐이지 비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직장 내 성폭력은 갈수록 증가하지만 여성들의 수치심 등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므로 은폐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확실한 증거 확보가 요구되고 조사 기간이 길어져 회사의 압박이나 주변의 적대감 때문에 거의 자진 퇴사로 이어지고 있다. 더구나 대부분의 남성들이 성폭력 피해자들 스스로가 사건을 유발했다는 파렴치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폭행을 당하므로 겪는 자책과 분노와 함께 다시 임신이라는 혹은 성병 감염이라는 후유증을 접할 때 피해자 여성들은 더욱 절망하게 된다. 정신적 신체적으로 손상을 입게 되어 미래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전에 만난 딸 셋의 아버지인 영국인 의사는 자신의 딸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약물중독과 성폭력의 희생자가 안 되는 것이 제일 큰 바람이라고 했다.

요즘 아동성폭력 범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사회 여론이 들끓고 있다. 아동성폭력범 대부분이 약물이나 알콜 중독, 정신장애 등의 병력을 갖고 있으므로 피해자의 손상과 충격에 비해 중벌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국회와 정부는 성폭력범들의 후속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효과적인 처벌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피해 아동이나 여성들도 성폭행으로 인한 후유증을 예방하기 위해 빠르고 능동적인 방어 교육뿐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상처를 적극 치료하기 위한 사회 차원의 관심과 보호가 필요하다.

김숙희<관악구의사회장ㆍ김숙희산부인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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