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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진칼럼]대물림
[임원진칼럼]대물림
  • 의사신문
  • 승인 2016.02.2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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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영 서울시의사회 재무이사
임선영 재무이사.

지난해 11월 초였다. 14살 소녀가 청소년 쉼터 상담선생님의 등 뒤에 숨어 진료실로 들어왔다.

윤곽이 뚜렷한 우윳빛 얼굴에 오뚝한 코, 아기사슴 담비를 닮은 큰 눈동자, 영화 `테스'의 주인공이 연상됐다. 그녀는 약 4개월간의 무월경을 호소하며 산부인과 검진 대에 올랐다. 연실 무섭다며 급기야는 울음을 터뜨리더니 “엄마” 하며 나의가슴에 먼저 안겼다. 한 손으로는 등을 다독이고 말로 달래가며 진료를 마쳤다. 임신 5개월 차였다. 청소년 임신은 늘 펼쳐질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먼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가족이 알면 안 된다며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다시 울기 시작했다. 이런 날은 안타까움과 답답함이 교차하여 나 자신도 몹시 우울해진다.

그로부터 3일 뒤 마음의 평정을 찾은 그녀는 산전 혈액검사를 받기 위해 다시 내원했다.

“아빠도 저를 저처럼 낳으셨어요. 엄마는 제가 두 살 때 떠났대요.”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사실은 아빠는 33세 미혼부였다. 엄마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선생님 뒤에 병아리처럼 매달렸구나'라고 가늠을 해보게 되었다. 본인도 엄마가 되기로 했고 미혼모 시설로 입소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선생님 지금 하루 세끼 라면만 먹고 있어요. 시설로 들어가면 잘 먹게 되겠지요?”

미혼모시설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려움보다는 들뜸이 엿보였다. 내 마음도 놓였다. 15세에 미혼모가 되는 셈인 그녀는 조부모와 미혼부 그리고 미혼인 삼촌과 함께 살고 있었다. 57세인 할머니는 `내가 이 나이에 증조할머니가 되는구나.' 라는 말만 되뇌며 속내를 표현했다고 전했다. 31살인 미혼의 삼촌도 `내가 할아버지가 되는구나.' 라는 말을 했다며 그녀는 뱃속의 태어날 아기 때문에 자기 가족의 위치가 한 단계식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코미디하듯 이야기했다.

전형적인 미혼부, 미혼모의 대물림이다. 그녀는 아이 아빠가 18세인데 출산 후 찾아서 아이를 함께 키울 거라고 한다. 부디 그렇게 하길 기원했다. 부와 신분의 대물림이 논란이 되는 세상에 아직 한창 부모에게 투정하며 사춘기를 겪어야 할 나이 어린 소녀의 양가감정을 보는 듯해 안쓰러웠다.

내게 두 달간 산전 진찰을 받은 후 미혼모 시설에 입소한 그녀에게 바자에서 산 고은빛깔의 배내옷을 선물했다. 나 역시 할머니가 되고도 남을 나이인지라 아이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그녀는 감사하다며 연락을 해왔다.

“선생님 딸이라는데 왜 미리 말씀 안 해주셨어요.”

목소리엔 그냥 어린아이의 티 없음이 와이파이를 타고 전해졌다. 부디 엄마처럼 아이를 키우면 안 된다고 못 박으며 그곳에서 몸과 마음의 평안을 얻고 출산 후의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검정고시를 해서라도 고교졸업장은 받아야 한다고 나름 덕담을 했다. 그래 봐야 산후조리까지 포함해 6개월 남짓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며칠 뒤 청소년 쉼터 상담선생님과 함께 방문한 다른 친구는 17세 소녀였다. 편모슬하에서 살아가는 그녀와 16세 소년인 남자친구는 내가 보기엔 둘 다 어린 아가들이었다. 그녀는 초기 임신상태였고 부모가 되겠다며 진료실에서조차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동행한 엄마는 임신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악에 받친 듯 아이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앞으로 임신을 절대 못 하게 해 달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부모가 되고자 하는 아이에게 이런 심한 말을 하다니, 엄마와 딸 둘 다 다독이며 국가가 지원해주는 청소년 산모를 위한 임신확인서는 나중에 발급하기로 하고 다음 검진 일정을 일러주었다. 그날은 정말로 긴 하루였다.

이 아이들이 신분의 대물림은 물론 빈곤의 대물림이 될 것은 눈에 불 보듯 뻔하다.

우리 사회가 여러 방면에서 서구화돼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공동체도 서류상은 미혼부, 미혼모로 동거부부 형태의 가족구성이 50%를 넘어선 유럽을 따라가는 게 아닐까? 늦은 결혼에 출산을 꺼리는 사회적 흐름에 예기치 않게 청소년 미혼부, 미혼모를 양산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었다. 시인 쉼 보르스카는 “우리는 누구나 준비 없이 와서 연습도 못 하고 살다 떠난다.”고 했다. 그러나 먼 훗날, 우리 사회가 유럽 전철을 밟아간다 하더라도 너무 이른 나이에 아무 준비 없이 부모가 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는 않다.

나의 작은 진료실에서도 일어나는 단편적인 경우이나 길거리를 떠도는 가출 청소년, 긴급도움이 필요한 위기청소년은 진즉에 수만 명을 넘어섰다. 이들 청소년은 대부분 부모의 이혼 등 가정해체로 조부모 손에 자라거나 편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아이들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려면 한 마을이 통째로 나서야 한다는데 우리는 주위를 돌아볼 틈조차 없이 숨 가쁘게 살아왔다. 국가에 청소년 문제를 일임하기엔 위기청소년들이 너무 많다.

다문화가정의 위기청소년들, 어려움에 부닥친 탈북청소년들도 숨은 복병들이다. 첨단과학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놀랄만한 시대에 살게 되었지만, 군중 속의 고독은 심화돼가고 있다.

현대판 신분의 대물림은 이렇게 조용히 우리 사회의 바닥부터 저변 확대되고 있다. 이들을 잘 보듬고 가야 하는 것은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과 의무다. 내일의 우리 사회 주인이 될 청소년들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도록 우리 모두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이다.

실제적인 성교육부터 가치관 정립, 인간에 대한 배려와 관용의 자세를 몸에 밴 습관이 되게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먼저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사랑으로 무장한 공동체를 꿈꾸는 것은 단지 바램일까?

나는 진료실에서 만난 그녀들의 아이가 지혜롭고 다재다능하다는 원숭이의 해에 큰 복을 지니고 건강하게 태어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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