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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진칼럼]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임원진칼럼]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
  • 의사신문
  • 승인 2016.02.1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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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대 서울시의사회 보험이사

 

얼마 전 대학 동기들 band에 공지 글이 눈에 띄었습니다. 고 안 수현 동기 10주년 추모식.

한참 잊고 지냈던 그 친구를 떠올리면서 예전에 읽었던 `그 청년 바보의사'를 다시금 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 전, 내과 전문의를 마치고 군의관으로 근무하다 유행성 출혈열로 안타깝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고 안수현…. 그 친구의 삶과 생전에 남겼던 글을 모아 만든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친절이 아니라 진심으로 환자들을 사랑했던 삶을 보여줌으로써 환자에 대한 신실함이 무엇인가, 소위 참의사란 어떤 삶인가를 돌아보게 해주었던 책이었습니다.

다시금 읽었던 그 책으로 인해 새삼스럽게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의사로서 잘 사는 걸까? 더 솔직히 이야기해보면 어떻게 환자들에게 대할 때 더 잘 버는 걸까? 하고 말입니다.

최신 장비, 최첨단 기술 그리고 update한 술기 등은 환자들에게 정확한 진단과 최상의 치료를 해 준다는 점에서 별 이견이 없을지 모릅니다.

또한, 잘 짜여진 의료 제도와 법령은 효율적이고 보다 경제적인 적정진료를 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요즈음에는 우리가 그러한 제도 아래로 견인 당해 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환자에 대한 의사의 자세와 신실함 같은 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왠지 out of date 인 듯합니다.

저도 어느덧 개원 10년차에 접어들면서, 진료가 환자를 보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만한 짬밥이 된 것 같다는 건방진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진료를 보다 보면 환자에 대한 치료가 보험 기준에 맞는 적응증을 가지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봐야 합니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없는 이유를 넣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자동차보험 환자의 경우에는 이 환자에게 secondary gain이 있는 건 아닌지 짧은 진료 시간동안 통밥을 굴려야 하는 잔머리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어떨 때는 환자 스스로 실손 보험 운운하면서, 별 필요하지도 않은 비급여 치료를 해달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다른 병원처럼 패키지 치료 없냐고 묻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청구할 때는 삭감의 위협을 피해가는 요령 터득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때도 있고 어떻게 해야 심평원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나를 고민해야 하기도 합니다.

수개월 전부터 개인정보보호 자율점검으로 한참 의사들이 우왕좌왕했고 여전히 말이 많습니다.

끊임없이 이야기되는 원격 의료, 한의사들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운운하는 최근 문제들을 보면 맘 편하게 진료를 보게 의사들을 놔두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에 화가 나고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실함과 참의사 운운한다는 것이 참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개업의로서 안정감을 갖게 되면서 점점 변해가는 나의 모습 중에 변하면 안 되는 것이 바로 그 신실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환자들의 질병을 치료해줄 뿐 아니라 질병을 유발하는 상황을 공감하고 돌봐줄 수 있는 그래서 환자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의사가 되는 것이, 잊어서는 안 되는 `초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원래 라틴어로 믿음과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충성은 같은 단어 pistis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어떤 환자에게 육신의 질병은 그 사람이 갖고있는 아픔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육신의 질병뿐 아니라 수면 아래에 도사리고 있는 더 큰 아픔을 볼 줄 알아야 하며, 용기 있게 문을 두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 청년 바보 의사 중에서)…

팍팍한 의료 현실과 하루에 한 건씩 벌어지는 병원 안팎에서 생기는 사건, 사고들로 인해 차가워지는 저와 우리의 마음이 한 젊은 의사의 신실함과 사랑이 주었던 감동으로 녹여지고 훈훈해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인간애에 기반한 합리적인 제도와 문제해결이 이루어지도록 지금 앞에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져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의 사마천이 쓴 〈사기〉에 보면 도이불언 하자성혜(桃李不言 下自成蹊)란 말이 나옵니다.

이광이라는 충신의 삶을 평가하면서 언급했던 것인데, 복숭아와 오얏 나무는 말이 없지만 그 아래에는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덕망 있는 사람은 자신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람이 모인다는 것이지요.

날씨가 추워지다 보면 환자는 자연히 줄어들게 되고 진료시간도 여유가 생기게 됩니다. 환자들에게 덕망있다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내일부터라도 환자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어보고 위로의 공감대를 더 갖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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