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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4〉
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4〉
  • 의사신문
  • 승인 2016.01.11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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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47〉 

■천불전의 가허루와 창암 이삼만

두륜산 대흥사의 남쪽 구역에 있는 주 법당인 천불전 입구의 가허루. 창암 이삼만의 글씨다.

두륜산 계곡에서부터 흘러 남쪽으로 향하며 대흥사를 북원과 남원으로 가르는 시내가 금당천(金塘川)입니다. 북원의 대웅보전을 보러 들어갈 때는 이미 한 번 읽어본 적이 있는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의 편액에 관한 일화만이 머리에 맴돌아 이리 저리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금당천을 건너기 전 침계루의 편액을 보고는 원교의 글씨임을 짐작했습니다. 침계루(枕溪樓)는 글자 그대로 `시냇물을 베개 삼은 누대'라는 뜻입니다. 대흥사의 침계루는 금당천을 베개 삼아 자리하고 뜨락 너머의 대웅보전을 마주보고 있습니다.

안으로 성큼 들어가 그의 또 다른 편액 대웅보전을 보고 왼쪽의 백설당 건물 추녀 아래에 겸손하게 자리 잡은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을 보고 나니 비로소 북원의 다른 건물들과 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탑과 산신각과 명부전을 돌아봅니다.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라 하니 참 오랜 세월을 무던히도 견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원교의 대웅보전과 추사의 무량수각을 보고나니 이미 마음이 천불전에 가 있어 이 북원의 다른 어떤 형상도 마음 깊이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끄는 대로 다시 금당천을 건너 나와 남원의 천불전으로 향합니다. 그제야 석축이 눈에 들어옵니다. 돌마다 이끼 옷을 입었고 그 틈에서는 이름을 모르는 고사리류의 식물이 자라나오고 있습니다. 짧지만 운치 있는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마주한 수령 오백여년의 거목 두 그루.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우람하고 씩씩한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습니다. 가까이 서서 자라던 느티나무 두 그루의 뿌리가 하나가 된 연리근입니다. 두 그루의 나무가 가까이 자라다가 그 등걸이 붙어 한 그루가 되면 연리목이라 하고 뻗어나간 가지로 두 나무가 이어지면 연리지라고 합니다.

뿌리든 등걸이든 혹은 가지든 하나로 이어지기까지는 서로 부딪치고 그 껍질이 뭉개지고 상처 난 속살이 서로 맞대어지고 그리고 껍질이 그 상처를 보듬고 덮을 때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는 영원한 사랑을 맹세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노부부는 지난 시절의 행복과 아픔을 돌이켜 생각하며 한 세상 잘 살아왔다고 할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그래서 사는 방식이 달라도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서로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더라도 언젠가는 결국 하나가 되고 말 것입니다.

가허루 앞에 섰습니다. 흐트러짐 없는 해서체 글씨입니다. 그런데 왼쪽 끝 아래 귀퉁이에 찍힌 낙관에 눈이 갑니다. 편액의 단정한 글씨에 비해 마치 글씨를 처음 배워 겨우 제 이름 석자를 쓴 아이의 손 글씨를 닮았습니다. 게다가 오른쪽의 이(李) 자는 위의 나무 목(木) 자와 아들 자(子) 자가 너무 떨어져 있어 처음엔 얼핏 목자삼만(木子三晩)으로까지 보입니다. 꾸밈없이 순진한 작은 글자들이 큰 글씨를 압도합니다.

서예가 심석 김병기는 이 가허루 편액에 대해 `창암은 현판글씨만큼은 예술성도 예술성이지만 가독성(可讀性), 즉 일반인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 모양으로 쓰는 것을 매우 중시한 것 같다. 이 가허루 현판은 창암의 이러한 서예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고 평했습니다.

가허루를 통과하면 마당 건너편에 천불전이 있습니다. 천불전의 편액은 원교 이광사의 글씨입니다. 대웅보전과 침계루에 이어 원교의 세 번째 글씨를 만납니다. 창암 이삼만은 원교의 글씨를 보고 배웠다고 합니다. 천불전과 가허루를 통해 스승과 제자는 이렇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조선 말 우리의 독자적인 글씨를 추구했던 두 명의 위대한 서예가를 만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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