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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의사회 창립 100주년 기념수필 -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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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신문
  • 승인 2015.12.0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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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호 수필가·수석회 회장, 서울시의사회 고문

`귀 잘린 고흐' 연상…나만의 자화상 그리려 노력

 

김인호 고문.

출근 전, 면도 폼을 밀며 거울 속의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세월의 깊이를 부정할 수 없다. 깊게 패인 주름살과 함몰된 양측 볼 그리고 흰 머리, 탄력 잃은 목덜미와 검은 반점이 섞인 눈 밑도 붕어처럼 쳐져 있다. “저 모습이 나야! 내 얼굴이라구…!” 자조 섞인 독백만 메아리칠 뿐, 돌이킬 수 없는 형상은 마냥 나를 지켜보고 있다. 언뜻 붕대로 감은 귀 잘린 고흐의 청황색 자화상이 떠오른다. 아마 그도 그때 즈음 이런 느낌이었으리라. 팽팽한 탄력으로 줄기차게 달려갈 때에는 얼굴 따위는 신경 쓸 경황이 없었고, 직장과 조직사회가 운동부족으로 불러들인 복부 비만을 걱정해 헬스장을 찾곤 했었다.

어느 날, 낙엽 진 가을 들녘을 천천히 걷거나 도심의 찬바람에 옷깃을 여밀 때, 왕성하게 앞질러 가던 유능한 동기생의 뜬금없는 별세 소식에 뜨거웠던 젊음이 지나갔음을 알았다. 그 젊음은 한 순간 열정으로 세월을 감싸 안았지만, 그 세월은 그 속의 청춘을 덧없이 빼앗아 가버렸다.

그러나 선배 의사들이 은퇴 후 가는 길들을 지켜보며, 어떤 길이 인간답고 후회 없는 여생인지 그 분들이 걸어 왔었던 그 길들에서 나만의 자화상을 꾸미려 세모(歲暮)를 서성거리고 있다.

“요즘 K 선생님 병세는 어떤가요. 이번 모임에 꼭 선생님을 모시고 싶은데요.” 어렵게 초청의사를 전했는데 뜻밖에, “아시잖아요. 그 양반 성격을…거의 두문불출하시고 친구들도 대면하지 않는답니다. 이런 자기 모습을 보인다는게 더 없이 창피해 한답니다. 옛날의 자존심은 남아 성격은 아직도 청춘 때 그대로랍니다.”

K 선생님의 수필에서 `아내는 기둥이고 나는 어디까지나 말뚝'이라며 모든 것을 척척 해결하거나 손수 해치우신다는 사모님의 안타까운 답변에 나는 당황했다. 충분히 그러실 분이라 감이 왔다.

그 분과의 마지막 뒷모습은 성격만큼 단호하게, “이제 여러분과 같이 어울려 풍류를 즐길 수 없겠습니다. 그 동안 이 곳 모임에서는 쌓인 스트레스나 철학이 없는 의료 정책을 마음껏 비판해 왔었는데 건강이 여기까지 인 것 같아요.”하시며 명쾌하게 고별인사를 하며 떠났었다. 신기능 부전과 심장 스턴트 삽입등 지병으로 입원 생활을 하던 터라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2년 전 일이었다.

- 나는 개업 초기, 젊었던 시절에 서너 곳의 남성 신사복 회사로부터 모델이 되어 달라는 요구를 받은 적이 있었다. 중년이 지나면서 더욱 세련된 양복과 넥타이 그리고 트렌치코트 등을 본 사람들이 나의 탁월한 선별안을 칭찬하지만, 그런 것들은 아내가 구입해서 챙겨 준 복식이지 내가 구입한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나는 백화점 쇼윈도 안에 서있는 표정없는 마네킹이고 아내는 유럽 일류 브랜드의 코디네이트다-(수석회 수필집 제46권 `내 마음의 텃밭'에서)

기실 그 분의 글처럼 젊을 때의 외모는 훤칠한 키에 댄디한 귀공자 모습으로 달변가여서 TV아침프로 질병상담의 의사 게스트로 명망이 높았고 여성지 모델로 인기가 넘쳤다. 그리고 필력이 좋아 의협 공보담당으로 활동한 적도 있었다. 그 분이 2000년도에 쓰신 글제목만 보더라도 이미 15년 후 의사들의 운명을 제시하고 있었다.

-개업이란 이름의 서바이벌 게임(택시드라이버 시대가 멀지 않다)
-로데오 거리의 성형외과(의료가 왜곡되면 그 직접 피해자는 국민이 된다.)
-허위청구가 의보재정 파탄원인이 아니다.
항상 절제된 표현으로 좌중의 무게를 품위 있게 이끄는 힘이 있었는데 그 뒤에는 생활의 철학이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랬던 분이 최근에는 `파킨슨 병'까지 겹쳤다하니 안타깝다.

“이번 모임이 50년 되는 기념일이라 K 선생님이 오셔서 지난 이야기도 하셔야지요. 잘 설득해 보세요. 사모님!” 하고 간청을 하자 “최근에는 보고픈 사람들 이야길 가끔 말씀하시니 그럼 제가 설득해서 모시고 가도록 해볼께요.” 각오하신듯 단호하게 응해주었다. 이 해가 저물 때쯤 K 선생님의 미소를 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세월의 무심함에 새삼 두려워 진다. 흐트러진 자화상에 열정 깊은 자존심을 그려 넣으려는 그 젊음은 이제 가고 없다. 고흐처럼 그냥 고난의 흔적과 현상만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수석회 50년 역사를 지켜온 선배 의사들의 자화상을 그려보면서 인생의 황혼기가 청장년과 달리 심오한 향기가 있음을 본다. 웰빙(well-being)과 일빙(ill-being)의 삶을 UN 2005년 보고서는 무기력함과 추진력으로 차이를 두었다. 비록 고속 정보통신 시대, 스마트폰 시대의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일이 일상을 지배하지만, 시골 석양에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처럼 연륜이 베인 잔잔한 여정 같은 것이 우리를 훨씬 풍요롭게 해 준다.

은퇴한 선배들의 사회공헌 활동 등 멋진 인생은 귀감
나의 노년도 활력 넘치는 `자랑스러운 주름살' 되길

피부과학 L 교수는 정년하신 후 대학교 명예총장으로 재임하면서 미술학 대학원에 입학,3년 동안 연구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파리와 유럽 각지 미술관을 다니면서 역사적 의미가 깃든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단아하며 학문적 깊이를 지닌 그 분은 본인의 버킷리스트 첫 항목에“육체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배낭 하나 메고 자유롭게 떠나는 `유럽 문화 탐방 나들이'를 해야겠다.”고 기록하겠다니 의사로서 예술에 심취하고 있으니 웰빙임에 틀림이 없다.

비뇨기과학 S 교수의 `전립선'사랑은 유별나다. 정년이 지났지만 종합병원 진료를 하면서 전국의 무의촌 마을, 심지어 울릉도 뱃길까지 찾아 가 시골 노인들의 괴로운 배뇨장애를 교육 상담 무료치료해 주는 전립선 전도사 정열은 특이하다. 고통을 참는 환자에게 직접 찾아가 의료시술 해주는 시혜, 자기희생 없이는 상상할 수 없는 `노인 섬김 시스템'이 정착되는 힘은 그 분을 중심으로 전 현직 비뇨기과 교수들이 무상 동참하는 것으로 그 빛을 내고 있다. 항상 적극적이고 사교적이며 긍정적인 생활 방식으로, 앞으로 2025년도에 통일 후 모임을 갖자며 기염을 토하시니 아직 청춘이 다하지 않으셨다.

희수(77세)가 된 소아과 K 선생님의 여생을 보면 박애정신은 인내와 사랑임을 알게 된다.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의사가 되어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배운 의술을 베푸는 것이었다고 한다. 33년 개원한 소아과를 접고 가난하고 소외된 노숙자, 행려자, 알콜 의존증자, 외국인 근로자들을 무료로 치료해 주는 영등포 요셉의원에서 10년 넘게 의료 봉사하고 있다. 폐렴에 2차례나 감염되면서도 힘든 봉사자의 길을 걸으며 진정 나눔의 즐거움을 취하는 삶을 보면 자신감과 행복이 가득해 보인다.

금년에 미수(88세)를 맞이한 의사이자 사업가이신 K 회장님의 노익장을 빠트릴 수 없다. 독일 후라이부르그 대학에서 내과를 전공하던 중 선친의 부름으로 척박한 제약 기업을 인계받아 국내 굴지의 제약회사로 일구어 낸 자전적 인물로 기업 경영 마케팅의 선두였다.

일예로 드링크 `박카스'의 신화와 한국 최초로 오란-씨 오픈골프대회를 창설, 한국 프로 골퍼를 육성하며 기업 홍보를 하여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의사로서 기업가로서 전경련(全經聯)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는데 아직도 서예, 수필을 쓰며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 분이 주장하는 선배시민(Senior person)으로서의 노인학 지론으로는 `자기할 일을 스스로 하고 항상 건강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100세 건강 수칙으로는 `감기에 걸리지 말고, 넘어지지 말고, 많이 먹지 말자'로서 평범하지만 나이 든 사람(Aged person) 개인에게는 각자 유념해야 할 경륜 깊은 조언이다.

나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 분들 서클에 참여하여 의사로서 그리고 인생의 선배로서 지나 온 그 분들의 발자취를 보아 왔다. 아름답게 늙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환경에서 화려한 단풍으로 들려주는 지혜는 은발의 지휘자가 보여주는 노련미와 노숙함이 보였다.

개인적으로 이 분들 모두 의술과 인문학을 접목하고, 특히 일기장 같은 수필을 쓰며 인생을 뒤돌아보신다. 이 분들 모두 깊은 주름에 백발이 성성하여 외관상으로는 고령자 대우를 받으며 뒷짐 지고 살아야 하실 때다. 그러나 누구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힘과 정신은 무엇이고 또 그것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려는 남모른 노력이 있을 것이고, `학문과 도덕과 예술적 몰입'에 삶의 가치를 두지 않았을까. 물론 나약함을 떨쳐낸 자신감 넘친 의지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인생을 되돌려 놓거나 되돌아 갈 수는 없는 때이지만, 되돌아 볼 수는 있는 나이에서 나의 자화상을 다시 한 번 그려 본다. 후회스럽지 않고, 인간으로서 긍지를 잃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고 유연하며 깨끗한 늙음. 그것은 희생과 봉사를 수용하는 자세가 아닐까. 희망이라면 결코 헛된 늙음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생동감과 활력이 넘친 의미있고 자랑스러운 주름살이 되길 바래본다. (서울시의사회 100주년을 축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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