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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향십리
난향십리
  • 의사신문
  • 승인 2009.10.07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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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촉이 올라올 때는 고동색으로 올라오고 그 속에서 나오는 잎은 가장자리에 흰 테두리를 두르고 있다. 이렇게 잎 가장자리의 흰 무늬를 복륜이라고 한다. 잎의 변화와 꽃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난이다.
이제 가을 난의 계절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난 대부분이 가을에 꽃을 피웁니다. 관음소심, 철골소심, 적아소심 그리고 이들로부터 파생된 수많은 변이종 난들이 이제 막 꽃대를 올릴 것입니다.

소심이라는 이름이 붙은 난들은 대개 꽃이 연녹색이며 꽃 가운데 혀처럼 생긴 부분이 잡티 없는 흰색입니다. 흴 소(素) 자에 마음 심(心) 자를 씁니다. 누군가 참 소박하기도 하고 멋있는 이름을 붙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무실에서 키우고 있는 난 한 분이 지난 주 슬그머니 꽃대를 올리더니 엊그제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햇살이 강해지는 10시쯤 되면 향을 내뿜기 시작합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 직원의 말을 빌리면 향수를 뿌린 듯 지날 때마다 문득 코끝을 스칩니다.

이 난은 지난 여름 있었던 신임 원장 취임식 때 얻어온 것입니다. 그날 취임식장엔 온통 난 천지였습니다. 저 난들을 다 어찌할까 궁금하게 여겼는데 모두 다시 팔아서 좋은 일에 쓴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보기에 좋은 난, 값이 좀 나갈듯한 난은 그날 일찌감치 새 주인을 만났습니다. 남은 난들은 다음날부터 하루하루 값이 낮아지며 모두 팔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난을 보낸 사람, 받은 사람 그리고 그 난들을 다시 분양받은 사람까지 모두 마음이 흐뭇해졌고, 그리고 그 종자돈의 혜택을 받을 사람까지 행복을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난들이 모두 정리되고 며칠 지나서 원장실에 갔다가 아직 남아 있는 두 개의 화분을 데려왔습니다. 봄에 올라온 새 촉들은 거의 다 자랐고 그 사이로 꽃대가 제법 여럿 달려 있었습니다. 어미 촉들이 고생을 참 많이도 했습니다. 사무실에 오자마자 시들기 시작한 꽃대를 모두 잘랐습니다. 난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제철이 아닌 때에 강제로 꽃을 피웠으니 향이 제대로 흘러 퍼질리 없고 꽃도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물을 준지 꽤 된듯하여 흠뻑 물을 주고 창가에 두었습니다.



잎이 제법 튼실하니 내년 봄이면 짙은 고동색의 새 촉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고, 곧 그 치마잎이 벌어지며 가장자리에 흰 테를 두른 연초록의 새 잎들이 삐어져 나올 것입니다. 여름이 다가오면 위로 뻗던 잎들이 옆으로 벌어지기 전 잎 가장자리의 흰 무늬는 더 선명해지겠지요. 그리고 아침과 저녁으로 선선함을 느낄 때 쯤 제철의 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난은 여전히 별 탈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몇몇 잎의 윤기가 전만 못합니다. 사고가 난 것입니다. 여름이라 수분 증발이 빠를 것이라 생각하고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주었는데 화분 속 습기가 과했습니다. 잎자루 부분이 거뭇하게 변했습니다. 살짝 당겨보니 잎들이 힘없이 쏙 빠집니다.

급한 마음에 화분을 쏟아 이미 썩은 촉을 골라내고 나머지는 흐르는 수돗물로 씻어 신문지로 싸두었습니다. 화분과 돌까지 씻었습니다. 이튿날 저녁 다시 심었습니다. 행여 또 사고라도 날까 하여 물주기를 더디게 하며 한여름을 지냈습니다. 소독제를 쓰지 않았는데도 다행히 난은 더 이상 상하지 않고 잘 버텼고 꽃까지 올린 것입니다. 마음 써 준 것을 꽃으로 보답하는 듯합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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