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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2〉 - 이광사의 자취
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2〉 - 이광사의 자취
  • 의사신문
  • 승인 2015.11.09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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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45〉
해남 대흥사의 본전인 대웅보전의 편액. 제주도로 유배가던 추사가 원교 이광사의 이 글씨를 떼어 내고 걸라며 써 준 편액이 무량수각이다. 훗날 유배생활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던 추사는 `원교의 글씨도 다시 보니 괜찮다'고 평했다고 한다. 추사의 편액 무량수각은 지금 대웅보전 왼쪽의 건물 처마 아래 걸려 있다.

두 번째 일주문을 들어가면 오른쪽에 부도밭이 있습니다. 아직 대흥사 경내까지는 더 걸어야 합니다. 9월 중준이었는데 길가에 꽃무릇이 붉게 피기 시작했습니다.

고창 선운사 일대의 꽃무릇이 활짝 피었을 때의 장관에 비하면 여긴 이제 시작입니다. 심기 시작한지 오래 되지 않은 듯 그저 한 줄로 늘어서서 꽃대를 올리고 있습니다. 커다란 검은 나비가 꽃을 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걷다가 난간 없는 다리를 건넙니다.

그리고 세 번째의 문을 마주합니다. 해탈문입니다. 거침없이 미끈한 행서체의 `頭輪山大興寺' 편액을 바라봅니다.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살았던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의 글씨입니다.

요직을 두루 거치며 그는 누구보다 꼿꼿하고 청렴한 관리이자 학자로 평가를 받았습니다. 서예가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다만 일제의 국권침탈과 함께 자작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친일행위자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해탈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대흥사 경내에 이릅니다. 돌아서서 문 밖을 내다보니 9월 오후의 햇살과 곧 사라질 숲의 초록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편안하게 보이는 저곳은 속세입니다. 문득 문밖 세상의 풍경도 볼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이곳은 속세와는 단절된 곳입니다. 그제야 문 안쪽에 걸려있는 또 다른 편액의 글씨 `해탈문'이 보입니다.

문 밖에 걸려 있는 행서와는 다른 느낌의 글씨입니다. 거침없으되 편안한 느낌의 글씨는 아닙니다. 원교 이광사 (圓嶠 李匡師)의 글씨입니다. 원교는 추사보다 한 세대 전에 시대를 풍미한 조선 후기 최고 서예가 중의 한 명입니다.

아버지 형제가 권력 싸움에서 밀려나면서 그 여파로 원교는 세상에 나가 이렇다 할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유배 생활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지막 23년은 완도 옆의 작은 섬 신지도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여러 사찰에 편액을 남겼는데 글씨들은 가슴에 맺혀 있는 응어리들이 붓끝을 통해 서리서리 풀어져 획 속에 뼈가 된 듯 얼핏 부드러우면서도 강인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대흥사엔 해탈문(解脫門), 침계루 (枕溪樓), 대웅보전(大雄寶殿), 천불전(千佛展)의 편액이 그의 글씨입니다.

조선 말 글씨로 이름 높았던 원교였지만 지금은 누구나 이름 석 자는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혹평을 받았습니다.

권세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일찍부터 청의 고명한 학자들과 교류했던 천재학자 추사의 눈에 호남에 유배되어 평생을 살며 일가를 이룬 원교의 글씨는 속된 말로 표현하면 `촌스러움'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가던 중에 대흥사에 들렀을 때 원교의 글씨 `대웅보전' 현판을 떼어내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원교의 글씨에 대한 추사의 평가는 혹독했습니다. 50대 중반에 시작된 추사의 유배생활은 60대 중반이 되어서야 끝났습니다.

60대 중반의 노인이 돌아가는 길에 대흥사에 들러 다시 한 마디 합니다. “다시 보니 괜찮군.” 추사가 써준 예서체 편액 `무량수각(无量壽閣)'은 원교의 편액이 걸린 `대웅보전' 왼쪽의 백설당 건물 처마 아래에 걸려 있습니다. 초의선사의 넓은 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며 한 마당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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