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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쁜 내과 선생님 
가장 바쁜 내과 선생님 
  • 의사신문
  • 승인 2015.11.09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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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26〉 

이용국 선생님은 내과 의국 선배로 서울 변두리 시장 옆에서 개업하고 있다. 전공의를 마친 후 K대학병원에 교수로 있다가 40년 동안 한 곳에서 개업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개업의사는 공휴일과 일요일 외에는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료를 하여 항상 피곤한 상태이다. 여기에 병이 생기면 바로 병원 진료에 영향이 있으므로 일과 후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하루에 한두 건 이상 매일 바깥 약속이 있다.

의사협회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학회, 동문회, 친구 친지의 경조사와 각종 모임에 반드시 참석한다. 교제 범위도 넓어 시골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동문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문화 체육계에 많은 친구 동료가 있다. 땅딸막한 체구에 큰 얼굴, 넓은 이마, 두꺼운 목덜미, 두툼한 손에 굵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뛰어나지 않은 외모지만 정신과 의사 말에 의하면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어 가장 개업을 잘 하는 타입이란다.

이용국 선생님은 교수 출신 개업의사로 가장 모범적인 분이다. 개업한 후 미국에서 내과 교과서 신판이 발간되자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진료 전까지 1시간씩 공부해 6개월 만에 독파하였다고 한다.

새롭게 개발된 의료기법이나 기기가 생기면 새벽이나 주말에 교육 받고 습득하여 본인 병원에서도 선진의술을 환자에게 제공한다. 지금도 진료 중에 의문점이 생기면 스스럼없이 대학병원에 있는 전문분야의 후배들에게 전화하여 최신지견을 배운다. 개인병원이지만 중증 내과 환자를 입원시켜 골수검사까지 한 적이 있다. 한번은 위장출혈 환자가 공휴일에 왔는데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봐야 혼잡하고 어설픈 전공의가 진료한다고 생각하여 본인이 치료하다가 휴일이 끝나서야 큰 병원으로 이송하였단다. 위급하거나 중증 환자는 기피하는 보통 개업의와는 다른 진정한 임상의사인 것이다.

이런 소문에 찾아오는 환자는 꽤 많아 아침에 진료 순서 번호표를 나눠주어야 한다. 개업의사로 소위 성공한 것이다. 조그만 의원이지만 큰 병원에서와 같이 검사, 영상촬영, 진찰, 행정 등에 대한 프로토콜이 있고 이를 철저하게 기록한다. 한번은 그 의원에 아르바이트로 간 일요일에 병원 위층에 있는 선생님 댁에서 점심을 같이하다가 약주를 곁들이게 되었다. 광주 출신인 사모님이 만든 막걸리의 감칠맛에 그만 둘 다 취해버렸다. 오후 1시가 되자 일층 외래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왜 선생님이 안 나오시냐?”고 아우성이었다. 이 선생님은 환자들한테 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미안하지만 월요일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냈다. 환자와의 라뽀가 대단한 것이다.

선생님에 관한 전설 같은 실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열린 마음으로 스케일이 큰 행동을 자주하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가 가까이 있어 대학생을 진료하면서 도와 준 미담이 적지 않다. 스님이나 신부님 같은 종교인은 친분이 없어도 무료 진료를 해 오히려 그 분들이 놀란다.

한때 테니스 중고등학교 협회장을 한 적이 있는데 경기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온 시골 학생들을 자기 병원 입원실에 숙박시키기도 하였다. 각종 동문회에 적극 참여하는 그는 당연히 회장을 많이 맡아 그야말로 물심양면으로 기여한다. 우리 동위원소실 동문회장과 내과 동문회장도 각각 10년 동안이나 하였다.

이 선생님과 나는 인연이 많았다. 개업 당시 내과 일년차인 나는 선배들과 참석하여 축하해주었고 집이 가까운 관계로 우리식구들이 특히 만성기관지염을 앓고 있는 아버지가 신세를 많이 졌다. 레지던트 때부터 군의관 시절까지 일요일 날 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대학에 있는 후배와 개업가의 선배로 서로 도와주고 아껴주고 있다. 가족들도 가까워져 이제는 아저씨-조카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내가 인복은 많은 편이다.

여수 출신인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서울로 유학을 왔다. 평범한 사립 고등학교에서 사투리를 못 고치는 시골학생은 공부에만 열중해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듬직한 체구와 융통성 있는 성격에, 약삭빠른 서울학생과는 다르게 무던하고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어느새 동료들의 리더가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수련 과정 중에 병원의 비합리적 대우에 반발한 인턴파동의 주동자로 고생도 하였다. 고창순 교수님 밑에서 박사학위를 하면서 연구에 눈이 떠지는 계기가 되었다. 학위 과제는 정하였으나 동료들과 회식을 즐기고 연구에 진전이 없었다. 답답해진 고 선생님이 하루는 집에 있는 침구를 연구실로 가지고 오셨다. 지엄한 교수님에게 꼼짝없이 붙잡혀 밤낮으로 몰두해 일주일 만에 연구결과를 얻었단다.

군대를 제대하면서 나는 내과와 핵의학 중 하나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여러 이유도 있었지만 선생님 병원에서 경험에 핵의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결심하였다. 소화불량, 감기몸살이 대다수인 많은 환자를 진료하는 개업 내과의사 생활이, 게으르지만 약간 학구적인 나에게는 무료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역설적으로 선생님 개업이 잘 된 것이 내가 내과를 떠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인왕산의 큰 바위같이 항상 침착하고 믿음직하게 환자를 진료하는 선생님에게 그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환자 상태가 나빠지면 나도 두려워. 좋은 일을 하는데 도와달라고 하느님에게 속으로 기도하면서 진료하고 있다. 그래도 두려우면 이번에는 부처님한테 기도한단다.” 이 말에 나는 깨달았다. 병원 일과 마찬가지로 바깥일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하고 있다는 것을. 또 모든 일에는 지름길이 따로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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