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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1〉
두륜산 대흥사의 문자향 〈1〉
  • 의사신문
  • 승인 2015.10.2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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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44〉

좋은 경치 속에 사모하고 그리워할 만한 사람들의 자취가 샘처럼 솟아나는 여행지를 꼽자면 단연 해남이 으뜸입니다.

해남 두륜산 대흥사 일주문. 우리나라 현대 서예계의 거장인 여초 김응현 선생의 글씨다.

대흥사를 품고 있는 두륜산 꼭대기에서 남도를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고 땅끝 전망대에 마련된 풍경 역시 이에 못지않습니다. 땅끝 전망대에서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바라보는 바다 역시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을 보자면 전라우수영성지와 진도대교 입구의 울돌목 해안가에 조성되어 있는 전라우수영 관광지를 찾아갈 일입니다.

연동마을의 녹우단엔 고산 윤선도와 공재 윤두서의 자취가 남아있고 멀지 않은 곳엔 아직 기억에 생생한 김남주 시인과 고정희 시인의 생가가 있습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의 고계봉에 올라 왼쪽 저 멀리 보이는 강진을 바라보고 만덕산의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던 다산 정약용을 생각했습니다. 정면 남쪽의 큰 섬은 완도가 분명하고 오른쪽 먼 곳의 어느 섬이 진도일 것입니다. 올망졸망한 섬들을 뿌려놓은 바다를 바라보다 시선이 문득 진도에 이르러서는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내려와 대흥사로 향했습니다. 주차장에서 대흥사 일주문까지는 걷기에 좋은 길입니다. 울창한 나무 터널 속으로 길이 이어집니다. 늦은 봄 나뭇잎이 거의 다 피어날 무렵 비라도 슬쩍 뿌린다면 이 길 위에서 누구라도 시인이 될 듯합니다.

대흥사 입구엔 오래된 한옥 여관인 유선관이 있습니다. 십여 년 전 이곳에서 하룻밤 지낸 적이 있습니다. 뒤쪽으로 도랑이 흐르며 물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웃거리다 보니 장독대의 항아리 뚜껑에 베짱이 한 마리가 앉아 아침 해를 맞아 이슬에 젖은 날개를 말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9월 초순이었으니 남은 날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었겠지요.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이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주말이라면 옛날의 조용한 정취를 느끼기엔 다소 소란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지나갑니다.

그리고 일주문과 마주합니다. 예서체의 현판 글씨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는 여초 김응현 (如初 金膺顯) 선생이 썼습니다. 그의 형 일중 김충현과 함께 우리나라의 20세기 현대 서예를 이끈 명필이었습니다.

이 현판엔 `무외헌'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강원도 인제에 있는 만해마을 근처에 인제군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여초서예관을 개관하고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단체에서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서예공모전을 개최하고 서예학과가 개설되어 있는 대학이 있을 정도로 서예 저변이 넓게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시대 탓일지는 모르나 서예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예술의 전당에 미술관과는 별도로 서예관이 마련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절집에 들어서며 이런저런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 생각이 어지러워집니다.

일주문 왼쪽에 주차장이 있습니다. 걸어서 올라오기에 불편하거나 시간이 많지 않다면 여기까지 차로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차로 올라오면 아름다운 길의 운치는 포기해야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밭을 바라보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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