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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석곡…고산과 너럭바위
시인과 석곡…고산과 너럭바위
  • 의사신문
  • 승인 2009.09.28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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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길도 세연정<사진 위>와 몇년 전 꽃시장에 갔다가 구입한 석곡<사진 아래>
해남 땅끝마을 포구에서 보길도행 배를 탔습니다. 겹겹이 쌓인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 먼 곳까지 와서 다시 더 남쪽의 섬으로 들어갈 일은 없었을지 모릅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만나 뚝딱 두어버린 바둑 한 판이 인연이 되어 그와 10년 지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이디가 눈에 익어갈 즈음,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직장을 잃어버린 기러기 아빠가 되었습니다. 마흔다섯의 나이에 준비 없이 당한 일이라 한 동안 넋을 놓고 살았습니다. 그 때 인터넷 저편의 그가 나를 불렀습니다. 그를 따라 나서 지리산을 올랐고 그의 친구가 터를 잡고 있다는 보길도로 향한 것입니다.

고산 윤선도의 손길이 남아 있는 세연정 근처의 야트막한 언덕 중간 쯤 그의 집이 있었습니다. 투박한 돌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서니 개들이 우렁차게 짖어댑니다. 조용히 하라는 주인의 한마디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듭니다. 대문이 없는 이 집이 좋아졌습니다.

작은 정원엔 이런 저런 나무와 꽃이 편안히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툇마루엔 진돗개 한 마리가 엎드려 무심한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두 친구는 할 이야기가 많은 듯합니다. 슬며시 일어나 집을 돌아서는데 거기에도 진돗개 한 마리가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몸 전체가 얼룩얼룩 한 털로 뒤덮여 있어 참 험하게 보였습니다. 원체 개를 무서워하는 터라 슬그머니 겁이 납니다. 그런데 길동이라는 이 녀석은 내겐 전혀 관심도 없습니다. 주인 찾아온 손님을 알아본 게지요.

호기심에 이곳저곳을 살피는데 입구 쪽 돌담 아래에 석곡 한포기가 자라고 있습니다. 이곳 보길도의 어느 바위틈에서 자라던 것을 이웃에 사는 분이 옮겨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화단 저 안쪽에는 춘란도 몇 포기 보입니다. 때맞추어 물주고 분갈이하고 거름 주고 행여 병들까 살충제 뿌리고, 그렇게 호들갑 떨지 않고 저리 무심하게 두어도 풀과 나무와 함께 어울려 잘 자라는 것을. 시인은 그렇게 난을 보듬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서 느릿느릿 세연정으로 향했습니다. 문을 나서는데 주인이 세연정 맞은편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다며 그곳을 꼭 보라고 권합니다. 세연정은 참으로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석축을 쌓고 판석을 놓아 가꾼 인공 연못 가운데 정자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보이는 나무와 꽃에 눈을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돌들 틈새마다 이곳을 가꾸던 사람들의 땀이 배어나오고 있었습니다.

주인이 말한 오솔길로 들어섰습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길입니다. 동백나무가 꽤 많이 자라고 있고 숲도 제법입니다. 드문드문 춘란도 꽤 많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춘란 포기들을 살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내가 이 난들을 살피기 전에 벌써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각으로 이 난들을 다 훑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캐내지 않고 남겨 둔 것만도 다행한 일입니다.

꽤 올라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앞에 커다란 바위가 나타났습니다. 옆길로 돌아가 바위위에 오르니 말 그대로 너럭바위입니다. 저 아래 세연정이 한 눈에 보이고 멀리 바다와 그 너머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아련합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받으며 세연정의 흔들리는 등불과 어스름한 바다를 바라보던 고산의 모습이 보입니다. 어부사시사는 여기서 쓴 작품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근식〈건국대병원 홍보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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