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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주인이 다시 주인 노릇하는 운곡습지 
원 주인이 다시 주인 노릇하는 운곡습지 
  • 의사신문
  • 승인 2015.09.2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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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이 있는 정담 〈142〉
사람이 떠나고 삼십여 년 만에 풀과 나무가 그 흔적을 지우고 크고 작은 산짐승과 함께 어울려 이곳 운곡습지의 새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고인돌을 보며 천천히 매산재를 올라갑니다. 재 너머에 운곡습지가 있습니다. 한 때는 물이 풍부해 농사짓기 좋은 땅이었고 150가구가 넘게 살던 마을도 있었습니다. 재너머 살던 사람들이 닥나무껍질과 이런저런 작물을 이고 지고 넘나들던 고개를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해진 논과 밭, 마을이 있던 자리를 가득 메운 나무와 풀과 꽃 그리고 거기에 깃든 산짐승의 자취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넘습니다.

매산재를 넘자 풍경이 달라집니다. 울울창창한 숲길이 호젓하게 저 앞에서 구부러집니다. 슬쩍 스치는 바람은 축축하고 여기저기 햇빛이 몇 줄기 들어오고 있을 뿐입니다.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6월 운곡습지를 찾아가는 길목엔 뱀딸기, 기린초, 인동꽃, 꿀풀꽃이 한창이었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자라던 닥나무엔 참으로 탐스러운 붉은 열매가 농익어 떨어지고 있었고 어성초는 드문드문 무성했습니다.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숲엔 잡목 위로 훌쩍 단숨에 자라 오른 햇대나무가 잎과 가지를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저 대숲도 예전엔 누군가 근처에 살면서 가꾸었을 것입니다. 길가엔 멀리서 뻐꾹새가 울고 소쩍새울음도 들립니다. 가까운 숲 속에서는 인기척에 놀란 작은 새들의 재재거림이 분주합니다. 이 숲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운곡습지 탐방로로 들어섰습니다.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습지 위로 1미터쯤 띄워서 설치한 길을 걷습니다. 이미 숲의 나무와 풀이 자랄 만큼 자라 머리 위의 하늘 말고는 온통 초록세상입니다. 마침 이곳을 찾아온 이가 없으니 나만의 세상입니다. 먼 데서, 가까운 데서 들리는 새들의 노래 소리만 여전합니다. 문득 다람쥐 한 마리가 인기척에 화들짝 놀라 나무를 타고 치닫다 가만히 멈추어서 눈치를 봅니다.

삼십여 년 전 이곳에 사람이 살았고 여기 논과 밭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습니다. 다만 수풀 너머 저쪽에 나란히 높이 자라 오른 미루나무를 보고 저기 어딘가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 있었고 여기 어디쯤엔 마을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문득 오른쪽 수풀 속에서 시멘트벽이 보입니다. 덩굴과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감싸 안고 있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저 덤불 속으로 무너져 사라질 것입니다.

운곡습지가 있는 오방골은 꽤 많은 사람들이 풍족한 물 덕분에 가뭄 걱정 없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마을입니다. 삼십여 년 전에 영광에 건설된 원자력발전소의 발전 용수와 상수도용 물을 확보하기 위해 운곡저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수백 년 넘게 대를 이어 살던 사람들이 떠나자 삼십여 년 만에 나무와 풀이 이곳에서 사람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있습니다.

나무데크로 만든 탐방로가 끝나는 곳에서 땅을 밟으며 작은 연못을 만났습니다. 먼저 온 이들이 귀에 익은 음악을 틀어놓고 그늘 속에서 낮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연못 위에 떠 있는 노란색의 어리연꽃을 가까이 보고자 했으나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이 떠난 지 30여 년 만에 거의 완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곳이니 누구든 이곳에 와서는 가능한 풀 한포기 나뭇잎 하나라도 손대지 말고 눈으로만 가만히 보고 가라는 뜻이라 많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이제 이곳의 주인은 900여 종에 가까운 풀과 나무와 새와 산짐승이니 외부에서 잠시 왔다 가는 이가 함부로 손댈 권리는 없습니다. 청미래덩굴이 함께 어울릴 나뭇가지를 찾아 손을 뻗고 있었습니다. 풍요의 뜻을 생각하며 천천히 걷기에 좋은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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