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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한 줄, 노래 한 소절의 힘 
글 한 줄, 노래 한 소절의 힘 
  • 의사신문
  • 승인 2015.09.15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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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22〉

세상사가 고도화됨에 따라 문화가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여가에 찾는 관광여행은 특히 개인 취향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그 효과가 크다. 예를 들어 소설, 노래, 영화, 드라마 등에서 우연히 얻은 어느 지역의 인상이나 정보가 여행지 선택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봉평읍은 옛날에는 아주 외진 산골이었다. 여기서 일제시대 소설가인 가산 이효석 선생이 태어났다. 선생은 초등학교만 이곳에서 다니고 서울로 이사해 경성제국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한때 사회주의 사상이 강한 동반작가였으나 서정적인 작가로 변신하여 그 유명한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1936년에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봉평읍 주변 강원도 지방 5일장에서 떠돌이 좌판상을 하는 허 생원이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동이를 만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뛰어난 서정성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이 작품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우리들에게 모두 친숙한 작품이다. 마지막 부분이 아들로 확신하는 장돌뱅이 동이 청년과 함께 봉평 시장 판을 떠나 운명의 여인 동이 엄마와의 재회를 기대하면서 달밤에 고개를 넘는 장면이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공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이 문장에서 나오는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 한 줄이 지금 봉평읍 5천여 명과 주변 주민을 먹여 살리고 있다. 8월 말부터 9월 초 사이에 피는 메밀꽃을 보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이 모여들고 읍내 식당에는 메밀을 원료로 한 각종 음식이 사시사철 날개 돋친 듯 팔린다.

이곳 관청과 주민들은 소설 속 이 한 줄의 글을 이용하여 관광객을 끌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메밀을 이용한 새로운 음식을 개발하여 전통적인 국수뿐만 아니라 메밀막국수, 메밀묵말이,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부침, 메밀막걸리, 메밀차를 내놓고 있다. 또한 볼거리를 위하여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봉평에 `메밀5일장'이라는 체험프로그램이 있고 6만평 규모의 메밀꽃밭을 조성하여 8월 하순부터 9월 중순까지 축제를 벌인다. 지역주민들은 생가를 복원하였고, 이효석 문학관을 크게 지어 자료를 전시하고 영상관을 만들었다. 또한 `이효석 문학의 숲'을 조성하여 소설 속에 나오는 주막집, 물레방앗간, 고갯길 등을 만들어 숲과 산림 속에서 작품을 음미하는 공간을 형성하였다.

마침 이 지역에 큰 리조트가 형성되어 스키장, 골프장, 수영장, 사격장 등 각종 스포츠 시설과 호텔, 식당 등이 들어서 메밀꽃 필 무렵의 볼거리, 먹을 거리와 함께 상승작용을 해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여기에 높은 산지에서 자라는 특용작물도 재배하여 주민들의 소득수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산 이효석 선생이라는 천재작가를 80년 전에 이웃에 두었던 인연 때문에 지금의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이효석 선생이 보답을 받아 1999년부터 대규모의 `평창효석문화제'를 만들어 각종 행사를 통해 그의 문학 업적을 추앙하고 있다.

또 하나 다른 예가 멀리 이탈리아에 있는 소렌토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에서 해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폼페이를 거쳐 아말피 반도에 이르게 된다. 약 50km에 달하는 아말피 해안선은 깎아지른 절벽 위 좁은 땅에 작은 도시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절경은 예부터 유명해 중세시대에는 수도원이 자리 잡고 근대에는 값비싼 호텔과 세계적인 부호들의 별장이 세워졌다.

절벽은 해안가에서 수직에 가깝게 가파르게 서있고, 마치 굴처럼 집들이 바위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다. 그 사이 땅 조각에 테라스를 만들고 과일, 채소, 포도, 올리브, 레몬 등을 재배하고 있다. 앞을 가로막은 건물이 없어 농장 집에서도 바다가 바로 내려다보이고, 수도원이나 호텔에서는 담청색의 잔잔한 지중해와 절벽 사이로 조그마한 모래밭이 있는 해안가가 보인다. 높이 있는 수도원과 호텔에서 따로 바닷가로 내려오는 길이 없어 바위를 뚫고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해안가와 연결되어 있다. 

아말피 반도에 있는 비슷한 환경의 여러 도시 중에 오직 소렌토에만 관광객이 가득하다. 그 이유는 순전히 크루티스가 작곡한 〈돌아오라 소렌토로〉라는 가곡 때문이다. 사연은 1902년 이탈리아 수상이 가뭄의 현장을 순방하는 길에 소렌토 호텔에 묵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시장이자 호텔 주인인 트라몬티노가 수상에게 우체국을 세워줄 것을 청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약속한 수상에게 언약을 잊지 못하도록 즉석에서 만든 노래가 〈돌아오라 소렌토로〉이다. 나중에 노래가 나폴리의 가요제에서 첫 선을 보여 많은 갈채를 받으면서 세계적인 명곡이 되었다.

 “아름다운 저 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 맘속에 잠시라도 떠날 때가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멀리 떠나간 그대를 나는 홀로 사모하여
 잊지 못할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노라
 돌-아오라 이곳을 잊지 말고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

나 역시 이곳을 여행할 때 소렌토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돌아오라 소렌토로 돌아오라'라는 이 한 소절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밤 중 내내 각 식당에서 이 노래를 연주하고 또 부르고 있었다. 노래 가사에서 착안해 엮은 가상의 스토리로 뮤지컬을 만들어 공연하는 곳도 있었다. 거꾸로 이 칸초네 때문에 소렌토를 방문하고 온 김에 아말피 해안선과 인근마을을 관광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와 같이 때로는 소설 속 한 줄의 문장과 가곡 속 한 소절의 노래 가락이 우리한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비슷한 소설과 음악에서 이렇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즉 이러한 문화적인 요소가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경우를 분석해보자. 우선 특출하게 아름다운 자연 소재가 있었다. 달밤에 특히 아름다운 메밀꽃 밭이 있고, 밝은 태양에서 절경인 해안선이 있었다. 여기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예술가가 있었다. 이효석 선생은 달밤의 메밀꽃밭 풍경을 우리 감각에 호소하여 서정적으로 비유했다. 시각과 후각을 동원하여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고, 여기에 주인공의 정서를 넣어 달빛마저 덩달아 흐뭇해졌다. 이 이태리 가곡의 가사에서도 시각, 후각적 표현으로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절벽 풍경을 묘사하고 여기서 떠난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렌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아름답지만 쉽고 시원하게 부를 수 있는 가창성이 좋은 노래 가락이다.

여기에 이 소설과 가곡을 모든 사람에게 친숙하게 만든 매개체가 있었다. 〈메밀꽃 필 무렵〉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모든 한국 사람이 알고 있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테너가수인 파바로티가 애창하여 우리들에게 친숙하다. 이렇게 조성된 환경을 경제적 요소로 확대시키려는 노력이 성공하였다. 봉평의 경우 관민이 함께 노력하고 또 큰 리조트를 유치하였고, 소렌토에서는 단순한 우체국 청원가를 세계적인 칸초네로 바꾸고, 노래처럼 활기와 열정이 있는 관광지로 변모시켰다. 물론 중요한 것으로 이러한 명성을 유지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된다.

요즘에는 소설이나 가곡보다도 유행가, TV드라마나 영화가 대중에게 더 친숙하다. 따라서 이런 문화 활동으로 관광지를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선전해야 한다. 내 생각에 제일 성공하고 있는 도시가 뉴욕이다. 각종 뉴욕에서의 삶을 미국영화로 영상화하여 우리 무의식에 접근해 많은 사람이 가보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우리 서울은 어떠한지? 세계인에게 무슨 이미지를 주고 있는지?

* 참고로 지금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에는 메밀꽃이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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