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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식당의 빈 자리 
교수식당의 빈 자리 
  • 의사신문
  • 승인 2015.08.31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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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21〉

1985년 11월 초 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전임강사로 발령받았다. 지금하고는 달라서 처음부터 교육부 소속 공무원인 소위 정규직이었다. 평소 보다 많은 20명의 젊은 교수들이 함께 임명장을 받았다. 운 좋게 그 해에 소아병원이 개원하여 교육부에서 많은 정원을 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관례로 선배 교수들에게 일일이 신임 인사를 다녀야 했다. 우리는 떼를 지어 교수 연구실을 돌아 다녔다. 스승님들은 이제는 서로 동료가 되었다고 농담 삼아 축하하면서 교수로서 필요한 사항에 대한 조언도 해줬다. 문제는 선생님이 방에 없는 경우였다. 어떤 외과 교수님은 바쁜 수술 일정 때문에 연구실에는 잠시 들렸다. 두세 번 갔으나 못 만나는 경우도 적지 않아 메모를 남기기도 하였다.

우리 대학병원은 본관 맨 위층에 교수식당이 있다. 점심식사를 하는 목적 이외에도 이때가 유일하게 다른 과 교수를 만날 수 있는 기회여서 많이들 이용하고 있다. 건물 구조가 사람 행동양상에 큰 영향을 주어 같이 근무해도 일하는 건물이나 층수가 다르면 수개월 동안 서로 못 만나기 일쑤였다.

교수식당에서도 자연히 비슷한 또래의 사람끼리 모여 밥을 먹는다. 처음에 가보니 배식코너 옆에 주니어 교수들이 앉고 식당 안쪽으로 시니어 교수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세월이 지나 우리가 점차 시니어가 되었어도 움직이기 싫어 그대로 자리를 이용해 식당 안쪽이 주니어 자리로 바뀌었다. 즉 우리는 30여 년을 식당 한 자리에서 계속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긴 시간을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고 있는 사람의 성격은 어떻게 변할까? 아마도 옛날 것을 고집하며 변화를 싫어하고 위아래 서열을 강조하는 고지식한 기성세대가 되기 십상이다. 실제 수술 때문에 우리가 뵙지 못하고 신임 인사 메모를 남겼던 선생님에게 성의가 없다고 야단을 맞은 것도 바로 식당 그 자리에서 였다. 이제는 그런 아름다운 전통이 없어졌다고 우리가 한탄한 것도 이 자리에서 였다. 그러나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쉽게 움직이는 현 세태에서 원칙과 전통을 지키는 예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 시절에는 어려운 스승님과 식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학문적으로 뛰어나신 분, 명의로 유명한 분, 학회나 협회를 주도하시는 분, 또는 인격적으로 훌륭하신 분과 함께 점심을 하면서 점차 가까워지기도 했다. 평범한 나와 비교해 “똑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왜 활동과 업적이 이렇게 다를까?” 하고 반문하면서 반성한 적도 있다.

여유 시간이 있으면 식사 후에 담소를 나누었다. 협진 환자를 상의하고 대학과 병원의 새 소식, 최신 의학 지견을 들을 수 있었다. 정치사회 시국, 경제, 스포츠 등 일반적 이야기도 즐겼다. 같이 식사하고 의견을 나누면서 글자 그대로 식구食口가 되어 저절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강한 유대감이 생겼다. 또한 30년을 같은 음식을 씹고 같은 화제로 웃고 울었으니, 얼굴 근육의 발달과 긴장도가 비슷해져 표정도 서로 닮아갈 수도 있겠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나타났다. 가까운 세대에서는 갑상선을 전공하는 조보연 교수님을 손꼽을 수 있다. 교수님은 독실한 불교신자로 불경의 내용부터 절의 건축양식까지 두루 깊은 지식을 갖추어 `도사道士'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소아정신과의 조수철 교수님은 고전음악에 대해 전문가에 못지 않는 지견을 알려주었다. 소화기내과 이효석 선생님은 다방면의 해박한 상식과 재치로 좌중을 압도하였다.
 
정신과 조맹제 교수님은 정치사회 현상을 넓은 안목으로 분석해 주곤 했다. 모두 학교를 떠났고 지금은 우리들이 시니어 석을 독차지하고 있다.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지만, 나는 가끔 이 자리에서 옛 선생님과 함께 이야기를 즐기던 장면을 회상하고는 한다.

대학에서는 65세 정년이 된 교수가 2월과 8월 말에 퇴임식을 갖는다. 전에는 나와는 관계없는 행사로 여겼으나 1985년에 같이 발령받은 동료교수 몇 분이 이번 8월 말에 떠나게 되어 마음이 스산하다. 나는 요즘 식당에서 판도 변화를 느끼고 있다. 물러가는 교수들이 식당에 잘 안 나와 시니어 자리가 비면서 다른 젊은(?) 선생님들이 우리자리에 앉는 것이 아닌가? 이 낯선 광경에 다소 당황하다가 생각해보니 그들도 이미 과장을 끝내고 선임교수가 되어있었다. 다시 더 생각해보니 다음에는 내가 나갈 차례였다. 삼십 여 년이 한 순간에 지나간 것이다!

마침 병원 영안실에는 삼성그룹의 장자였던 이맹희 씨 빈소가 차려져 있고 대신 전권을 가졌던 이건희 회장은 중병으로 쓰러져 있다.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 경제를 좌우했던 삼성가三星家의 형제들도 빈 손으로 떠나가고 있는 참이었다.

*이번에 정년 퇴임하시는 전국의 의대 교수님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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