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선임 교수
내가 꿈꾸는 선임 교수
  • 의사신문
  • 승인 2015.06.08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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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기의 마로니에 단상 〈16〉

 올해 초에 62세가 되면서 얼마 후면 대학병원에서 정년퇴직할 나이가 되었다. 아직도 현직에 계신 박용휘 선생님은 어느 날 잠자고 깨어나니 벌써 80세가 되었다고 세월의 빠름을 말씀하셨는데 나 역시 어느새 이 나이가 되었다.
 우리 또래는 모두 교실과 병원에서 원로 대접을 받고 있다. 각 교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병원장이 우리 동기 동창이니 병원 교직원 대부분이 나이로 보아 손아래이다. 우리 대학에서는 선임 교수라고 부르나, 원내 행사가 있는 경우 주로 건배를 의뢰받아 일명 건배 교수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심포지엄이나 학술대회에서도 발표자나 강사는 모두 아득한 후배들이고 우리는 좌장을 맡아 한두 마디 말한다. 실은 좌장도 요행이고 앞자리에 앉아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은 없다. 거의 모두 회사에서 퇴직을 했고 요행히 남아있는 사람은 이미 최고 CEO가 되어 회사 승용차로 모시고 다니기 때문이다. 농담 삼아 “우리들도 직장에 기사가 운전하는 BMW를 타고 다닌다.”고 말한다. 여기서 BMW는 독일제 고급 승용차가 아닌 Bus, Metro, Walk의 약자이다.
 우리 아들이 나에게 “한국 남자에게 가장 편한 직업이 무엇일까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정답은 군대의 병장이라고 했다. 곧 제대를 앞두고 있는 말년이라 부대 상관도 간섭하지 않고 아래 장병에게 지시만 내리면 되는 편한 직업이란다. 선임 교수도 병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60대에 들어가면서 몸과 마음이 전과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젊을 때와 비교해 신체기능과 체력이 떨어지고 크고 작은 병이 생기기 시작한다. 또 조직이나 사회를 움직이는 자리에서 뒤로 물러나면서 정신적으로 허탈감과 우울증이 생긴다.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하는 데도 옛날만 못하다. 내 경우에는 타인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기도 한다. 이야기할 때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상대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기 때문이다.

 중년이 넘으면 임상 증상이 없는 가벼운 갑상선기능저하증이 드물지 않게 생긴다. 노화에 따른 일종의 적응현상이다. 노쇠해진 심신을 덜 사용하도록 갑상선이 호르몬을 적게 만들어 신진대사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오래된 중고차는 천천히 운전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따라서 심한 경우만 치료하고 가벼운 저하증은 경과만 관찰한다.
 의학의 발달과 좋아진 생활 여건으로 한국인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다. 건강수명도 71세로 이때까지는 체력과 건강이 유지된다. 따라서 60세나 65세 이상을 노인 계층으로 정한 현재의 인구분류 방법을 변경하자는 의견이 많다. 이미 미국에서 60대를 old people 대신 senior citizen, 일본에서는 열매가 익어간다는 뜻으로 실년(實年), 중국에서는 숙년(熟年) 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말로는 `원숙기(圓熟期)'라고 하면 어떨까?

 그러나 사람이 나이가 드는 것과 성숙하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살아온 세월에 걸맞게 인격이 원만하고 훌륭해야 늙는 게 아니라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과 성찰 속에서 생활 철학과 역사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겪어온 삶의 궤적이 젊은이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동안 어떤 일에 부딪히면 우리 선생님이 어떻게 대처하셨는지 생각하고 흉내 내고는 했다. 정답을 제시 못해도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도 또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여기에 최신 지식과 실력을 겸비하면 금상첨화이다.

 특히 의료인에게는 그동안의 진료에서 얻은 노하우를 후배 의사들에게 알려 주어야 한다. 모든 환자가 각자 다른 환경에서 살고, 질병이 몸 안에서 일으키는 반응과 효과가 사람마다 다르므로  환자는 모두 개별적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환자별 맞춤진료가 art에 가까운 의술인 것이다.
 진료뿐 아니라 연구와 교육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교육은 우리 선임 교수가 집중해야 되는 의무이다. 부모가 유전자를 통해 신체적 성상을 자손에게 전수하듯이, 교수도 학문적인 유전자를 후배와 제자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연구 분야에서 리더십을 교육시키고, 의학발전을 예측하여 방향을 제시하는 것도 필수적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원로 교수는 평소와 색다른 시절을 보낸다. 60대는 기능이 저하되어 쉬엄쉬엄 가는 세월이 아니라 자신의 일생에서 얻은 결실로 자기실현을 만끽하는 시기이다. 이 결실은 새로운 씨앗으로 후학에게 연결되야 진정한 보람이 될 것이다. 성취감을 동반한 자기실현은 자아의 확장으로 이어져 타인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행복하고 성숙한 삶을 누리게 된다.

 바람직한 선임 교수는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소외된 병장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동안 삶과 자세가 후학의 본보기가 되는 원숙기 교수이다. 일생을 통해 얻은 의술, 의학의 핵심과 삶의 지혜를 좌장이나 건배를 하는 시간 뿐 아니라 평소에도 전수하면 후배와 후학은 진심으로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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